대둔산 정기 받은 마을에 감이 주렁주렁 휘돌아 마을 한 바퀴 운주면 소재지 도로변에서 양촌 방향으로 1km 가량 가다 보면 나오는 엄목마을은 본래 엄목과 현동의 두 개의 자연마을이 합쳐진 것으로 , 엄목은 엄나무가 많아서 ‘ 엄나무실 ’, 완창마을에서 내려오는 내 가운데 여울이 있어서 ‘ 여울목 ’ 이라 불렸다 .
앞으로는 대둔산을 , 사이로는 장선천을 두고 펼쳐지는 엄목마을에는 42 가구 , 80 여 명의 주민이 모여 살고 있다 . ■ 푸근한 인심을 맛보다 가을 햇볕으로 물든 엄목마을 어디서나 보이는 것이 감나무다 .
여태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 거의 다 수확되고 까치밥만 남은 나무 등을 따라 걷다가 커다란 창고 앞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 날이 좋아서 햇볕을 쬐러 나오셨나 물었더니 , 어르신은 깨를 다 털고 잠시 쉬는 중이라고 했다 .
엄목마을 토박이고 이곳 남자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다는 김병원 (83) 어르신은 집안이 대대로 감 농사를 지었다 . 지금도 엄목마을에서 감나무를 가장 많이 키우는데 , 무려 300 접이나 된다 . “ 지금 감이 제철인데 한 번 맛봐야지 .
저기 장대 있으니까 그거 가져와서 직접 따먹어봐 .” 병원 어르신이 알려주는 대로 푹 익은 홍시를 따서 반으로 갈랐다 . 그랬더니 어르신은 감의 속살만 봐도 어떤 게 달기만 하고 , 어떤 게 떫은 맛이 나는지 단번에 알아챈다 .
어떻게 척 보기만 해도 아냐고 묻자 그는 “ 한평생 감만 보고 살았는데 당연히 알지 .” 라며 웃었다 . ■ 항상 붙어 다니는 최고의 단짝 달짝지근한 인심을 맛본 후 마을 외곽을 걷다가 또 다른 어르신과 그를 경호하는 것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를 마주쳤다 .
다가가 인사를 나눠보니 엄목마을 김임숙 이장의 어머니인 윤수영 (92) 어르신이다 . 임숙 이장이 얼마 전 고산시장에서 데려왔다는 강아지 ‘ 호돌이 ’ 는 왕성한 호기심만큼 겁도 많다 . 그런 호돌이가 유독 수영 어르신을 잘 따른다고 한다 .
어르신이 한 발짝 뗄 때마다 다리에 따라붙는 것은 물론이고 앞서 나가다가도 어르신 걸음이 늦어지면 얌전히 앉아 기다린다 . 작은 소리 하나에도 쉽게 놀라는 호돌이가 편안히 앉아 쉬는 곳도 수영 어르신의 바로 옆자리다 .
수영 어르신은 “ 나 심심하지 말라고 자식들이 시장에서 데리고 왔는데 , 요즘 얘 때문에 적적할 날이 하루도 없다 . 산책할 때마다 쫄랑쫄랑 쫓아다니는 게 귀엽다 ” 고 웃으며 호돌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아름다운 대둔산 풍경을 담은 집 사이 좋은 수영 어르신과 호돌이를 뒤로 하고 언덕길을 걷다가 깨를 털고 있는 부부를 만났다 . 2017 년도부터 이곳에 집을 짓고 2022 년도에 귀촌한 전귀홍 (63), 임경희 (63) 씨다 .
부부의 초대를 받아 방문한 2 층짜리 주택은 뒤로는 병풍 같은 산을 , 앞으로는 장선천 넘어 대둔산을 두고 있다 . 거실에 통창을 내어 계절마다 바뀌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게 이 집의 자랑거리다 . 집의 구조와 내부 인테리어 모두 귀홍 씨가 고심한 결과물이다 .
본업이 아닌데도 수준급 실력의 원천이 궁금하다고 했더니 , 그는 “ 원래 인테리어 , 도배 , 타일 등 집수리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 귀촌해서 살 집은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 ” 고 말했다 .
‘ 집수리 부캐 학교 1 기 ’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던 귀홍 씨는 교육 수료 후 꾸준히 집수리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 “ 좋아하는 일이라 재미있기도 하고 , 어르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 고 말한 그는 최근에도 엄목마을 몇몇 가구의 전등 , 문 경첩 수리 등을 도왔다 .
상담 전문가로 일했던 경희 씨의 취미는 계절별 과일로 잼이나 청을 만드는 것이다 . 봄에는 딸기잼 , 가을과 겨울에는 생강과 청귤청을 담근다 . 그는 집에 오는 손님에게 정성 어린 선물을 주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
어느덧 부부가 엄목마을에 자리 잡은 지 2 년 차 , 아무런 연고도 없던 이곳에 안착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 둘은 입을 모아 ‘ 따뜻한 정 ’ 이라고 말했다 . “ 엄목마을은 충청도 경계인 곳이라서 예전부터 지역 간 교류가 많았다고 해요 .
그 덕분인지 어느 곳보다 이 마을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한테 배타적이지 않아요 . 누구든 반겨주시고 품어주시니 사람 살기 정말 좋은 마을이에요 .” ■ 엄목마을 사랑방 ‘ 육각정 ’ 언덕을 내려와 마을 중앙으로 가는 길에 산책하던 이연례 (95), 김옥순 (90) 어르신을 마주쳤다 .
오전에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왔다는 옥순 어르신은 “ 허리가 아파도 오늘 햇빛이 좋아서 운동하고 있었다 ” 고 말했다 . 마을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 어디인지 묻자 , 연례 어르신이 “ 날 추울 때 아니면 마을회관보다 육각정에 더 자주 모인다 ” 고 귀띔했다 .
사방이 유리창이라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육각정에 다다르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 이날 사랑방을 찾은 손님은 마을 인기쟁이 지영순 (83), 운주면 옥배마을에서 이사 온 강신례 (77) 어르신 , 그리고 노인회장 김완채 (77), 신수분 (73) 어르신이다 .
반갑게 맞아주는 어르신들 사이에 앉아 흘러 다니는 이야기를 들었다 . 아침 댓바람부터 대문 두드린 친구들 , 어제 김임숙 이장의 차를 타고 양촌시장에서 사 온 물건 , 곧 있을 김장 소식까지 대화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
특히 입담 좋은 영순 어르신이 말할 때마다 육각정 안이 깔깔 웃는 소리로 가득 찼다 . 마침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김임숙 이장까지 합류하니 분위기는 더욱 유쾌해진다 . 수분 어르신은 “ 남편이랑 점심 먹고 운동할 겸 마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꼭 육각정을 찾는다 .
와서 아무도 없으면 우리끼리 앉아 있다가 가고 , 누가 있으면 이렇게 재미있게 논다 ” 고 말했다 . ■ 든든한 가족들이 지켜준 터전 시끌벅적한 육각정을 나와 마을 입구 쪽으로 향했더니 이전에는 아무도 없던 곶감 덕장 작업장에서 누군가 있었다 .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집에서 사는 최상운 (65) 씨다 . 더 무르기 전에 수확한 감의 껍질을 깎아 꽂이에 거는 작업이 한창이다 . 상운 씨는 단감을 말려 반건조 곶감인 두레시를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
높은 천장에서부터 그의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린 감꽂이를 보고 감탄하니 , 그는 “ 지난해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많은 것도 아니다 ” 고 말했다 . 상운 씨 말에 따르면 올해 감 농사는 폭염에 이은 수해 때문에 평탄치 못했다 .
심지어 지난 7 월에 있었던 폭우 때문에 그는 인명피해도 입을 뻔했지만 , 반려견 ‘ 봉구 ’ 덕분에 큰일을 면할 수 있었다 . “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를 먹고 자는데 , 봉구가 막 밖에서 짖더라고요 . 약을 먹은 상태라 비몽사몽인데 봉구가 심하게 짖으니까 결국 일어났거든요 .
그랬더니 이미 방 안으로까지 물이 들어온 상태였죠 .” 봉구 덕분에 살았다는 상운 씨는 이후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형제들의 도움으로 작업장과 집을 정리할 수 있었다 . 그는 “ 넘친 물 때문에 집 담장도 무너지고 아주 쑥대밭이었다 .
그런데 그런 나보다 더 심한 피해를 본 집이 많아서 면사무소에 도와달라고 말도 못 하고 거의 혼자서 보수했다 ” 고 말했다 . 항상 곁을 지키는 봉구와 든든한 형제들에게 고맙다는 상운 씨의 바람은 “ 앞으로는 별 탈 없이 농사지으면서 봉구랑 즐겁게 사는 것 ” 이다 .
알록달록 물든 산 아래 엄목마을의 가을은 이렇게 조용히 익어가고 있다 .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품은 다정함이 주홍빛 감만큼이나 풍요로운 계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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