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쉴 틈 없이 바빴던 의상실, 이제는 마을의 사랑방 벌써 40여년 된 순의상실 민순 할머니가 드르륵 재봉틀을 돌린다 . 익숙하고 능숙하게 . 바짝 깎은 손톱에 크지 않은 손의 움직임이 야무지다 . 올해 일흔 하나인 그녀의 이름 석자 앞에는 아주 멋있는 수식어가 붙는다 . 의상 디자이너 .
“ 열여덟에 전주에 있는 양장학원을 다녔어 . 그러곤 스물둘에 서울에 갔지 . 서울 명동서 바느질했어 .” 국민순 (71) 할머니의 하루는 순의상실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 일터이자 집인 그녀만의 공간 .
35 년여가 넘도록 비와 눈을 견뎌낸 ‘ 순의상실 ’ 이란 작은 간판은 할머니의 정체성이자 삶의 이름표가 됐다 . “ 내 이름이 민순이잖아 . 국민순 . 쉽게 하려고 내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따서 순의상실이라고 지었지 .” 홀로 친척집에서 생활하며 명동에서 남의 의상실 일을 돕고 배웠다 .
그리고 그녀 나이 스물여덟 , 고향으로 내려와 처음 자신만의 가게를 차렸다 . “ 연애 결혼했어 . 그때 지금 아저씨는 여 고산에 계속 있었지 . 지금말로 장거리연애 한거야 . 이 길에 양장점만 8 개 정도 있었어 . 나도 그 중 하나였지 .” 오랜 시간을 주인과 함께 해온 재봉틀 등.
요즘 사람들은 공장의 영민한 기계들이 턱하니 만들어낸 세련된 기성복을 입는다 . 표준화된 디자인과 사이즈에 취향과 몸이 길들여졌다 . 민순 할머니가 만들던 옷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사람마다의 체형과 취향으로 완성되는 옷 . 민순 할머니는 한 벌의 옷에 존중이란 단어를 담았다 .
“ 나는 여자 옷이라고 생긴 건 다 만들었어 . 그 시절엔 옷을 다 맞춰 입었지 . 시집갈람 드레스도 맞춰 입어야 했던 시절이야 . 제일로 많이 만들었던 건 아무래도 투피스였지 . 옷 한 벌 가격이 쌀 한가마니 가격 정도 됐을걸 . 한 3~4 만원 했으려나 .
기억이 잘 안 나네 .”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특별하게 기억되는 자가용이 있다 . 회색빛깔 엘란트라 . 차량번호는 3872 번 . 잊을 수 없는 네 자리 숫자 . 그녀가 번 돈으로 장만한 차였다 . “ 고산중학교 교복을 정하는데 여러 디자인 중에 내 디자인이 된 거야 .
그때 전교생이 750 명이었으니까 내가 그 750 명 옷을 만든거지 . 그거해서 엘란트라를 뽑았잖아 . 차번호도 안 잊어버려 . 우리 애들도 그 교복 입고 학교 댕겼어 .” 열여덟에 처음 잡은 실과 바늘은 칠십이 넘어서까지 그녀의 바지런한 두 손에서 여전히 움직인다 .
“ 애들이 그때는 엄마가 이런 일 한다고 별로 안 좋아했었어 . 근데 지금은 이렇게 좋은 직업이 없다고 해 . 이렇게 나이 먹고도 일을 할 수 있으니까 .” 시대는 변한다 . 옷의 시대도 변했다 . 민순 할머니의 시대도 그 변화에 몸을 담았다 .
사람들은 공장에서 나온 옷을 입고 , 순의상실의 단골들도 서서히 기성복을 입기 시작했다 . “ 기성복 시대가 돌아오니 맞춤 옷을 입는 사람이 별로 없어 . 나도 나이를 먹고 힘들어서 요즘은 편하게 수선일을 많이 해 . 한 십년 됐나 .” 순의상실은 고산에 사는 이웃들의 사랑방이다.
의상실을 찾는 손님이자 이웃들을 위해 주인장이 쪄낸 고구마. 순의상실에는 늘 사람들이 모인다 . 비를 피해 들어오고 안부를 물으러 문을 열고 맛난 먹거리 하나 나누러 자리를 잡는다 . 덕분에 요즘 순의상실에는 고구마 박스가 쌓여있다 . 이웃들과 함께 나눠먹으려고 민순 할머니가 사다놓은 것이다 .
“ 시골은 이래 . 다 나눠먹고 그런거지 나만 그러간 . 3 년 전인가 건강이 안 좋아져서 여기 문을 닫으려고도 했는데 건강이 또 괜찮아지대 . 여기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어 . 사람들이 오가니까 .” 지난 스물두살 어린 아가씨는 낯선 서울의 풍경을 떠올린다 . “ 그때 외롭지 않았냐고 ?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잖아 . 외롭고 그런 건 다 똑같아 . 공평하지 .” 아마도 쉬지 않고 움직였을 바지런한 손과 , 그리고 실과 바늘이 있었기에 민순 할머니의 삶은 공평하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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