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하면서 벌어진 중동전쟁이 이제 한 달을 넘겼다. 저녁뉴스 첫머리는 아직도 이 전쟁 소식으로 채워지고 있다. 2주간의 임시휴전과 함께 종전협정에 들어갔지만 최근 협상이 깨지면서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상황이다.
그사이 숱한 인명이 희생되고 각종 산업시설은 물론 민간시설까지 파괴되면서 전쟁 피해는 계속 불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나아가 정유·에너지 관련 설비 파괴와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석유공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전쟁 여파는 전 세계로 퍼져가는 모양새다. 이에 따라 기름값 폭등과 비닐 농자재를 비롯한 석유화학제품 공급부족, 차량운행 5부제 등으로 피해는 어느새 우리의 삶 속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어쩌랴. 전장은 머나먼 저곳이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트럼프의 정신나간 행패에 분통을 터트리면서 어쨌거나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 사실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나 싶다. 이 와중에 봄날은 왔고, 사뿐사뿐 고운 걸음을 내딛느라 한창이다.
전쟁의 포화가 터질 즈음 망울이 맺혔던 매화는 피었다가 낙화한 지 오래고, 만개했던 벚꽃마저 하늘하늘 꽃비를 뿌리고 있다. 그 아래 빨갛게 아롱진 명자꽃과 노랗게 뭉개진 개나리는 아직 꿋꿋이 버티고 있다. 아, 이제 보니 복사꽃, 배꽃이 막 피어나는구나.
보름달이라도 떠오르면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봄밤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겠다.
뒷산 숲에도 봄은 흐드러졌다. 산목련, 산벚꽃, 산개나리, 산딸기... ‘산’자 붙은 꽃들은 이제 끝물이고 산자락에 야트막이 피어오를 차례. 제비꽃 가녀린 자태에 숨이 멎을 때쯤, 허물어진 무덤가에 말없이 고개 숙인 할미꽃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한다.
노란 별을 매단 앙증맞은 양지꽃, 꽃말(바람난 여인)처럼 간드러진 얼레지, 푸른 요정이 떠오르는 오밀조밀 현호색... 봄날 산길을 걸을 때는 발밑을 조심하라. 거기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세계가 깔려 있나니.
눈을 들어 바라보면 연두색 잔치. 겨우내 메말랐던 가지마다 새록새록 새순이 돋아나니 ‘자연의 신비’에 절로 빠져들게 된다. 나무란 나무는 모두 그렇게 생명을 이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겠다. 아뿔싸! 게 중에는 제 몫을 하기도 전에 인간에게 도륙당하는 순도 있으니 두릅이 첫손에 꼽힌다.
이맘때면 숲길을 걷다가 눈에 띄는 두릅순을 따다가 살짝 데쳐 초장에 찍어 쌉쌀하고 향긋한 호사를 누리게 된다.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라, 내친김에 벗들과 더불어 돌미나리, 쑥, 머위순... 갖은 봄나물 모둠전에 막걸리 잔 기울이는 맛은 또 어떻고.
한 순배, 두 순배 얼큰해지면 더 내친김에 봄나들이 날짜를 잡게 마련이다.
그렇지. 봄날은 울안에만, 뒷산에만 있는 게 아니렷다. 들머리길 활짝 핀 벚꽃 터널 지나 닿은 고즈넉한 산사에도 봄기운이 가득하다. 울금바위 시원한 기운 받고 근처 산채식당에 차려진 갖은 봄나물을 대하니 눈앞이 어질어질 해온다. 하지만 길은 또 이어진다.
이번엔 봄바다. 해변도로 따라 살랑대는 바람은 싱그럽고 바다는 짙푸르다. 적벽강-채석강 갯바위에 하얀 파도 부서지고, 수성당 언저리 드넓은 유채꽃밭은 샛노랗게 물들었다. 해 걸음, 수평선 붉게 물들이던 격포의 노을빛이 지금도 아련하다.
그렇게 봄날은 왔고, 또 가고 있다. 하지만 머지 않았다. 이 봄날의 끝자리에는 ‘농사철’이 딱 자리 잡고 있을 테니. 그래서 옛 시인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했겠지.
/비봉 염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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