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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면 신덕마을 남춘자 할머니2022-11-30

경천면 신덕마을 남춘자 할머니

이제는 농사 안짓는다고 하시면서 집 건너편 천평, 집 마당 오십 평 정도 밭은 재미삼아 왔다갔다 하신단다. 자식들 주려고 쥐눈 이콩을 수확하고 있는 남춘자 할머니.


내가 이 동네 일 대장이여


손닿는 곳에서 멀어진 어딘가에 먼지 쌓인 채로 방치되어 있는 사진첩들을 열어보면 시간여행자가 된 듯 순식간에 20~30년쯤의 시간은 거뜬히 넘나들게 된다. 하지만 오래된 사진첩을 열어본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간다. 스마트폰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 가벼운 손동작 하나 만으로 무엇이든 불러 올 수 있으니 말이다. 편리하지만 오히려 스스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나날, 나만 그러할까? 남춘자 할머니의(79) 기억은 오로지 머릿속에 있다. 지금은 즐거운 순간을 찰칵찰칵 쉽게도 기록하고 공유하지만 할머니 젊은 날의 순간들을 오로지 그 마음 안에 있다. 머릿속의 기억이 입말로 전해지는데 그 말들이 보는 것 보다 더 생생하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은 책을 내도 몇 권 낼 것이다, 원고를 쓰고 죽어야 하는데 쓸 지도 모르고 어찌하나 했더니 막내며느리가 지금부터 쓰시라고,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 쓰시라고 했다는데 우리의 만남은 시기적절한 만남이었다.

 

순전 남자 하는 일만 하고 살았지

남춘자 할머니 젊은 시절 한 동네 결혼은 드문 일이었다. 서로 속사정 알고 지내는 것이 민망해서 되도록 멀리 시집을 보내는 것이 수순인데 남춘자 할머니는 신덕마을 신작로 건너 구수굴로 시집을 왔고 여든을 앞둔 일생을 살아왔다.

 

초등학교 2학년 다니다 말았어. 전쟁 터져서 피난 가서 고생하고 돌아와서는 다른 사람들은 학교 다니는데 나는 못 다녔지. 학교 이야기 하니까 또 눈물 나네.. 나는 돈도 없었는데도 무작정 그냥 학교에 갔어. 책도 안사고 뭣도 안 사줘도 그냥 교실에 앉아 있었어. 근데 나중에는 내가 너무 부대끼니까 안 나갔지. 학교에서 회비 내라고 눈치를 주고 괴롭히니까 어린 아이가 당해낼 수가 있나.. 집이 하도 가난하니까 나를 양딸로 보내려고 했는데 내가 그러기는 싫다고 남의 집 살면서 돈이라도 벌어서 집에 보탠다고 그랬지. 열 몇 살 먹었을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했어. 그때도 일 잘한다 소리 듣고 대우받았지. 우리 친정아버지가 새끼들은 많고 집은 가난하니까 딸들을 아무렇게나 여의고 그랬지. 나는 결혼이 뭔지도 몰랐어. 18살에 결혼해서 19살에 큰 아들 낳았지.”

 

시집 안 간다고 아버지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친정아버지라고 한다. 평생 산에 가서 일만 하다 이 좋은 세상 구경도 못하고 60대에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산일은 논밭이 없는 가난한 이들이 기어코 먹고 살기 위해 하는 험한 일이다. 남춘자 할머니는 남자들도 하기 힘들다는 그 험한 일은 하며 젊은 날을 보냈다.

 

산으로 싸리 찌러 다녔어. 싸리나무를 낫으로 끊어서 가지고 오는 일을 그렇게 불렀어. 시집오자마자 다니던 일이야. 아이 뱃속에 있을 때 부텀. 동네 형님이랑 같이 새벽 4시에 나가서 집에 오면 저녁 8시야. 싸리 찌러 50리 길을 걸어갔어. 요동재, 용재원재, 마당재를 넘어 운주 피묵리 삼거리까지 갔지. 하이고, 지금은 거기 돈 1억 있으니 가서 찾아오라고 해도 못가. 이짝 산에 올라가 싸리 끊어서 한 군데 모아놓고 저 짝 산에 올라가서 한 다발 끊어 모아놓아. 다 모으면 20~30킬로씩 되었어. 그것을 질빵으로 묶어서 짊어지고 내려오는 거지. 그렇게 고생은 했어도 우리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보다 좋더라고. 왜 좋냐. 시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하는데 한 쪽에는 쌀을 한 쪽에는 서석을 앉혀. 그럼 나만 쌀밥으로 도시락을 싸줘. 그럼 내가 어휴 어른들이 쌀밥 드셔야지 괜찮다고 하면, 너는 산에 가서 허적거리고 돌아다니려면 얼마나 배고프겠냐.. 그러면서 쌀밥을 싸주는 거야. 깐 밥도 긁어서 싸주고. 산에서 일하다가 냇깔 근처에서 물 한 모금씩 떠먹으면서 그 밥을 먹었지.”


 

싸리나무를 해 와서 솥에 삶아 쪄서 겉껍질을 벗겨서 그 재료를 고산 장날에 가서 판돈으로 보리사고 쌀을 샀다. 험한 산에 오르며 가시에 걸려 찢어지고 해지는 옷과 신발은 기워 입어도 금세 찢어지곤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을 어루만지며 이것들은 왜 이리 질긴지, 어서 떨어져 또 사 입고 싶은데 왜 이리 질긴지 모르겠다며 웃어넘기신다.


 

일 잘한다고 소문난 동네 일꾼

첫째, 둘째 아들 장가보내고 막내아들 대학 다니던 때 급성간경화로 남편 분이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평생을 일만 하고 좋은 것 구경 못하고 떠난 친정아버지처럼 남편 또한 그러했다. 춘자 할머니 50세 되던 해, 슬픔이나 두려움이 들어설 마음의 공간조차 없었다. 자신의 아이들만은 지게 밑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해 뜨기 전에 일하러 나섰다.

 

남편 죽고는 오로지 돈이었어. 밖에서 일했는데 그게 두렵지는 않았어. 맥주 공장에서는 미화부 일을 했어. 정원이 엄청 컸어요. 거기서 밭을 매고 나무 심고. 그리고 옛날 전주백화점 들어가는 골목에 짱구만두 분식집에서 주방 일을 몇 년 다녔지. 번영로 신문보고 무작정 찾아가서 중앙여고 급식실에서 주방일도 했지. 첫차로 갔다가 막차로 와. 저녁에는 7시쯤 끝나면 버스타고 고산 와서 840분에 운주 가는 막차가 있는데 대간하고 그러니까 졸다가 운주까지 간적도 많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택시타고 집에 온 적도 있지. 그렇게 악을 쓰고 돈 벌러 다녔어.”

막내아들 장가보내고 60대 무렵부터는 주로 삼밭에서 일했다. 인삼 수확하는 작업은 분업화 되어 있는데 춘자 할머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삼 선별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일 많이 하고 잘한다는 소리 들어요. 선별하는데 나 따라오는 사람 없어. 삼밭에 들어가서 삼을 캐면 16~7가지가 나와요. 제일 큰 것들 중에서 특대, 대대, 중대, 소대, 믹서. 그 다음을 삼계라고 하는데 대삼계, 중삼계, 소삼계. 잔삼계, 실실이, 파삼, 이렇게 개려놔야 하는 거지. 보통 20~30명이 팀이 되어서 움직이는데 삼밭은 주로 금산에 많이 있고 팀 꾸리는 사람을 놉대장이라고 혀. 젊어서는 내가 경천 놉대장이었어. 금산 놉대장이 지금도 나한테 전화가 와. 같이 일하자고. 그런데 요즘은 아파서 못한다고 해. 우리 아들들이 나 어디 일하러 간다면 난리야. 농사짓는 사람들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루만 와서 풀 매달라 하루만 살려 달라 사정을 해. 지금은 돈 때문에 일가는 거 아냐. 지인들이 농사짓는데 내 손 필요하다고 하니까..내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아. 나를 좋아라해. 힘들어도 웃어감서 재밌게 일하니까.”

 

볕 좋은 가을 오후 쥐눈이 콩을 타작하는 남춘자, 집 마당 배추밭에서 웃고 있는 남춘자, 가족사진을 보며 흐뭇해하는 남춘자, 핸드폰에 담겨 있는 손주들 사진을 보는 남춘자. 춘자 할머니의 젊은 나날은 자신의 가슴 속에만 있지만 일흔 아홉 가을날, 남춘자 할머니의 빛나는 모습을 찰칵찰칵 사진으로 찍어 남겨 둔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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