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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간판에 말을 걸다] 용진 구억정미소2018-02-05

[오래된 간판에 말을 걸다] 용진 구억정미소



용진 구억정미소

사람은 바뀌어도 상호는 50년째 그대로



용진읍 구억리 길목 어디쯤에 구억정미소가 있다. 용진읍에서 소양으로 향하는 2차선 도로를 지나다 보면 파란색 함석판에 쓰인 이라는 간명한 단어가 보인다. 열려있는 커다란 철문 속으로 들어가 본다. 비뚤어진 나무로 짠 높은 천장, 빛바랜 나무로 된 긴 도정기, 높은 천장 속에서 들리는 참새 울음소리. 누구든 소리 내어 감탄할 수밖에 없는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용진 구억정미소 주인 이영섭씨가 지난 20년 세월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이영섭(57)씨는 구억정미소의 공식적인 여섯 번째 주인장이다. 1967319일 정미소가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51. 영섭 씨에게 물려준 다섯 번째의 주인장이 그의 아버지였는데 어쩌다보니 정미소가 를 잇는 가업이 되어 버렸다.


제대하고 보니까 아버지가 아프셨어요. 이거 안 하고 싶었는데 동생들 교육도 시켜야하고 부모 봉양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안 해요. 제대하고 나니까 제 나이가 스물여섯. 그때부터 여길 했으니까 제가 한지도 30여년은 됐네요. 처음엔 딴 세상이더라고요. 막막하고. 그래도 아버지가 하셨으니 낯설진 않았어요.”


방앗간 주인 이영섭씨의 인생 지향점. '웃으며 삽시다'



반백년의 역사처럼 정미소 구석구석에서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요새 흔히 보는 깨끗하고 간편한 도정기 대신 때가 묻고 키가 커다란 도정기가 서있다. 천장이 대략 건물 3, 4층 높이는 되어 보인다. 20, 30대였던 영섭씨가 통통기라고 부르던 발동기를 돌리면서 시작됐던 정미소의 하루. 지금은 모두 전기모터로 기계를 돌리다보니 몸은 편해졌다.


지금은 이런 기계 없죠. 기술 발달하기 전에는 도정기가 이렇게 높았어요. 승강기라고 불렀죠. 마을에 정미소가 하나씩은 있었는데 구억리에는 여기 하나였어요. 그땐 꽤나 컸죠. 동네 사람들이 소 구루마 끌고 경우기 타고 리어카 끌고 다 여기 왔었어요. 천장이 왜 높냐면요, 쌀은 열을 식히면서 찧어야 해요. 더운 공기가 다 위로 가야하니 높이 지을 수밖에요. 여름에는 되레 시원해요.”


구억정미소의 건물 기둥과 천장은 모두 나무로 되어있다. 쇠가 주는 세련되고 번듯한 느낌은 없지만 대신 나무가 가진 따뜻함이 있다

 

나무가 좋아요. 물을 머금고 뱉으니까 계절에 따라 온도 조절을 해요. 결로가 생길일도 없죠. 옛날 꺼가 좋아요. 예전에 태풍이 왔는데 컨테이너들이 뒤집어 지고 난리가 났어요. 걱정이 돼서 정미소를 와봤는데 문제없었어요. 천장에서 나무들이 움직이더라고요. 못 없이 짜 맞춤으로 된 것들이라 절대 부서지지 않아요. 유연성이 있죠. 그나저나 세월 훅 가버리네요. 30년도 금방 지났어요.”





구억정미소는 여섯 명의 주인을 맞이했지만 이름은 변한 적이 없다. 구억정미소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구억리에 위치한 당시의 하나뿐인 정미소였기에 이런 이름을 가졌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 이름 바뀌면 헷갈리잖아요. 그리고 이름 좋지 않아요? 돈이 많잖아요. 이름부터 구억이나 되니까.”


얼마 전 우리나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또 감소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정확한 수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두 끼도 안 먹는 셈이라고 했다. 특별한 날 먹을 수 있던 귀한 쌀밥을 이제는 앞에 두고도 먹지 않는 상황이다

     

옛날에는 쌀이 나라를 좌지우지 했잖아요. 정미소도 잘됐겠죠. 제가 일 시작했을 무렵부터 쌀값이 떨어졌어요. 우루과이라운드 때가 제일 힘들었네요. 쌀 수입 땜에 쌀값 떨어지고. 그때부터 방앗간들이 하향세를 겪은 거 같아요.”


구억정미소 간판은 모두 그가 만들었다. 자칭 맥가이버의 손에서 탄생한 튼튼한 간판이다.


내가 이 동네 맥가이버예요. 그림도 좀 그리니까 간판 글자도 페인트로 다 그렸죠.(웃음) 사람이 언젠가는 죽잖아요. 욕심내면 안돼요. 재미있게 살아야 되요. 그냥 재미있냐? 아니죠. ~주 재미있게 살다 가야되는 거예요. 나는 노는 게 제일 좋아요.”

 

정미소에서 정미라는 단어는 찧을 정’, ‘쌀미. 정은 찧다라는 뜻 외에 정하다, 깨끗하다, 정성스럽다는 의미도 있다. 정성스러운 쌀. 수십 년간 한자리에서 밥맛이 좋은 쌀을 찧어온 구억정미소의 밥맛이 문득 궁금해졌다. 왠지 낡고 오래된 나무처럼 따뜻한 맛이 날 거 같다.


1967년 3월 19일 입주표시가 있는 구억정미소의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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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삭제 2247일 전
세월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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