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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곁 안남마을] 안남마을 옛이야기2017-07-03

[느티나무 곁 안남마을] 안남마을 옛이야기

안남마을 옛이야기

용의형상 끊기니 핏물처럼 흙물 토해내

 

 

둥구나무 아리따운 안남마을

안남(雁南)이라는 이름은 마을 지세가 기러기가 남쪽을 향하여 날아가는 듯한 모양새라 하여 지어졌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정경운이 남긴 고대일록에도 1598년의 안남마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320일 을사(乙巳)

해가 저물녘哺時안남(雁南) 마을에 도착했다. 그 동쪽에는 정여복(鄭女復)의 새로운 집이 있는데, 산천이 특이하게 빼어나며, 주위 사방이 마치 껴안는 듯하니 참으로 빼어난 경치가 있는 곳이다. 촌가(村家)에서 잤다.

- 정경운(鄭慶雲), 고대일록(孤臺日錄) 3권 무술(戊戌, 1598)에서 발췌 -

 

과거에는 제법 마을이 컸다. 이길순(82) 할머니는 산 좋고 물 좋으니 공기도 좋아서 살기 참 좋다. 마을이 엄청 컸다. 옛날에는 사람도 많아서 윗동네, 아랫동네, 장덕 이렇게 불렀다. 장덕에는 장도 서고 그랬다고 회상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주막이, 뒷산에는 가마터와 봉수대

마을에는 주막이 2개 있었다. 소순덕(77) 할머니는 마을에 주막이 두 갠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동구나무 쪽에 있었다. 오두막집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막걸리를 마셨다고 말했다.

마을 뒤쪽은 북송골 장덕리로 조선시대 백자 가마터가 있었다고 알려진다. 가마가 2기나 되고 그릇을 사고파는 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또 뒷산에서 가장 높은 각시봉에는 현재도 봉수대가 남아있다. 봉수대는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해 불을 피워 중앙에 소식을 전하는 용도였다. 마을의 봉수대는 인근의 기린 봉수와 운암산의 관봉 봉수대를 잇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정월대보름 지신밟기를 할때 각시봉 봉수대까지 올라서 굿을 하고 내려왔다.

마을 초입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조선시대에 심어진 당산목으로 추정된다. 수명은 200년 이상, 평균 높이 30미터, 둘레만 해도 3미터가 넘는다.

 

쌍바우에서 돌이 떨어지면 초상이 난다

쌍바우에서 돌이 굴러 떨어져서 물에 풍덩하고 빠지면 초상이 났어.”

안남마을의 긴 역사를 대변하듯 마을 어르신들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다. 쌍바위에서 고산천으로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뒤로 보이는 산에는 도로가 나면서부터 젊은 남자가 죽는 일이 많아 마을에 과부가 많아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설명은 이렇다. 산새가 용의 형상을 닮아 과거 마을사람들은 산을 끊어 산길을 내면 안 된다고 했지만 새마을운동 때 길을 낸 것이다. 그때 마치 핏물처럼 흙물이 쏟아지고 이후로 마을이 시끄러워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마을 뒷산에는 고려장 터였다고 전해지는 굴도 여러 개 있다. 유영식 이장은 어린 시절 장난삼아 들어갔다 나오느라 애먹었다거나 하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안남마을 세시풍속

한편 안남마을은 전통을 이어 1년에 크게 2~3차례 세시풍속을 이어가는 동제와 잔치가 열린다. 당산제, 단오, 칠석, 백중이 그것이다. 특히 올해부터 정월대보름에 당산제를 크게 지내기 시작했다. 단오에는 둥구나무에 그네를 걸어놓고 타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다. 마을사람들이 한데모여 회관에서 음식을 마련해 나눠먹는다. 칠석이나 백중에는 돼지를 잡아 한바탕 마을잔치를 벌인다. 벼내기를 준비하고 하루 놀고 쉬면서 한해 농사의 수고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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