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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2019.11.13

큰 사람 난다 거인마을

한분이 할머니

마을과 사람, 계절과 공동체의 시간을 깊이 있게 기록하는 완두콩의 기획 기사 모음입니다.

등록 2019.11.13 15:28 조회 3,29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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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랍게 울었는데 이제는 날마다 웃어 ” 전쟁통에 족두르도 못쓴채 시집와 남편 일찍 여의고 혼자 자식 키워 며느리 복 "비행기 원없이 탔어" 집 앞 너른 나무평상 위에 한분이 (83) 할머니가 앉았다 .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공공근로를 막 마치고 온 참이다 .

평상 아래로는 마을의 다른 집들과 울긋불긋 물 들어가는 대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 그림 같은 풍경을 마주하고 할머니는 따뜻한 가을볕을 쐰다 . 평상 위 커다란 둥구나무가 그늘을 만든다 . “ 나무가 있어서 여기서 여름이면 할매들 모여서 많이 놀았어 . 근데 노인네들 다 죽어서 얼마 안 남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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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또래도 몇 명 안 남았네 .” 할머니는 16 세에 소양에서 거인마을로 시집왔다 . 어린나이에 3 대독자 외아들한테 시집와서 시집살이도 하면서 아들 여섯에 딸 하나를 낳았다 . “ 친정이 가난해서 열여섯 살 먹고 시집 왔어 . 전쟁 통에 결혼도 소반에 찬물 떠놓고 절한 걸로 끝났어 .

족두리도 안하고 . 그게 늙으니까 원이 되대 . 족두리 한번 못 써본 게 . 내가 시대를 잘못 태어난 거지 .” 남편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남은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할머니는 일을 많이 했다 . 고생 징그럽게 했다며 굽은 허리를 가리킨다 .

“ 허리수술하고 병원 다니면서 주사 맞고 하니까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 공공근로도 약 먹으면서 하니까 할만 해 . 남편이 빚지고 애들만 여럿 낳고 세상을 떠나니까 애들이 알아서 컸어 .

불알만 차고 시내로 나가서 일 하면서 핵교 다니고 .” 고생해서 키운 자녀들은 멀게는 서울 , 가깝게는 완주에서 산다 . 형제간에 우애가 좋다 . 얼마 전에는 취직한 손주가 용돈도 줬다 . “ 봉동 사는 손주 하나가 복지사로 일하는데 취직했다고 용돈 십만 원을 주고 갔어 . 어찌나 고맙던지 .

내가 손주 덕을 다 봐 . 우리 딸 ? 서울에 있는데 우리 딸은 바라보기도 아까워 . 아들만 여섯을 낳았으니 얼마나 귀혀 . 나 딸 낳고 동네잔치 했잖아 .” 몇 년 전에는 넷째 아들 내외와 함께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 족두리는 못 써봤지만 비행기는 원 없이 타봤다는 분이 할머니 .

“ 아들 내외랑 손주 , 안사돈까지 해서 넷이 태국인가 갔다 왔어 . 생전에 고생만 했으니까 구경이라도 하라고 우리를 데리고 간 거야 . 우리 넷째는 지금 ‘ 정년퇴직 ’ 해서 시골집 자주 왔다 갔다 해 .” 자식 자랑으로도 바쁘실 것 같은데 분이 할머니는 며느리 자랑에 더 바쁘다 .

“ 우리 며느리들이 하나같이 얌전하고 좋아 . 동네 사람들도 내가 시어머니 살아생전에 잘해서 복을 타서 그런 거 같다고 해 . 연속극 보면 며느리들이 못돼먹어서 시어머니랑 안 좋고 그러는 것도 있더만 . 근데 우리는 안 그래 . 며느리가 잘하니까 아들들도 잘하지 .

나는 자식들한테 재미있게 살아라 , 며느리한테 잘해라 늘 그래 .” 할머니는 유독 웃음이 많다 . 작은 이야기에도 ‘ 하하하 ’ 하고 큰 소리로 웃는다 . 예전에 사주팔자를 봤는데 말년에 덕을 보고 산다고 했던 말이 맞은 것 같다고 하신다 .

“ 옛날에는 힘들고 슬프면 나 혼자 숲에 들어가서 온갖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어 . 징그랍게 많이 울었네 . 힘드니까 . 근데 시방 지금은 좋아서 웃고 다녀 . 속 썩이는 사람이 없으니까 맨 날 웃고 다녀 . 죽을 때까지 좋게 살아야지 . 악한 말도 하면 안돼 .

그래야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어 .” 할머니의 남편도 , 대부분의 친정 식구들도 세상을 떠났다 . 자식들도 외지로 떠나 집에는 혼자다 . 외로울 만도 한데 할머니는 오히려 신경 쓸 게 없으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며 웃는다 . “ 예쁘세요 ” 라고 말을 건네니 할머니는 또 웃으신다 .

“ 내가 살다 살다 예쁘다는 소리는 첨 들어보네 . 하하하 ”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 할머니가 직접 심었다는 국화도 살랑살랑 춤을 춘다 .

현장 사진

한분이 할머니 사진 1

첨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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