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년 광두소 여전히 삶은 계속된다 여수 돌산을 출발한 17 번 국도는 전남과 전북 , 충남과 충북을 거쳐 경기 용인 양지에 닿는다 . 416.7km 에 이르는 짧지 않은 여정이다 . 길은 2 차선과 4 차선 , 6 차선이 번갈아 가는데 반가량이 시골풍경을 배경삼아 달리는 2 차선 작은 길이다 .
때때로 고라니와 함께 가는 길 . 그 길이 지나는 한 귀퉁이에 수몰이 예정된 광두소가 있다 . 장선댐 수문 공사가 한창인 마을 입구는 우회로 안내판이 먼저 반긴다. 우리가 처음 광두소에 갔던 건 2015 년 3 월이었다 .
꽃가지들은 막 봄바람을 맞아 기지개를 켜고 있었지만 삶의 터전과 고향을 등져야하는 주민들의 마음은 여전히 삭막한 겨울을 살고 있었다 . 광두소는 운주면 산북리 천등산 아래에 있다 . 이곳에 농업용수 공급 목적의 장선댐이 2005 년부터 건설되고 있다 .
예정대로라면 댐은 2015 년 완공되고 마을주민들은 그 전에 새로운 터전으로 옮겼어야 한다 . 하지만 사업은 차일피일 늦어졌고 2018 년으로 한 차례 미뤄졌던 이주일정은 다시 2024 년쯤으로 멀어졌다 . 12 월 초 다시 광두소를 찾았다 . 5 년 전 갔던 길은 막혀있었다 .
마을 입구 쪽에선 댐 수문 공사가 한창이다 . 고산에서 광두소에 가려면 새로 난 길을 따라 마을을 눈 아래 두고 지나쳐가다 우회해서 진입하는 방법밖에 없다 . 세월 앞에 기회도 근력도 사라져 댐건설이 결정되었을 때 이 마을에는 36 가구가 살고 있었다 .
이중 14 가구는 새 삶을 찾아 떠났고 22 가구는 농어촌공사가 만들어줄 새 보금자리를 10 년 넘게 기다리고 있다 . 그 사이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은 야금야금 바닥이 났거나 나고 있는 중이다 .
땅이나 집을 갖고 있던 주민들은 성에 안차는 금액일망정 보상이라도 받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세입자가구는 보상금도 없고 이주단지 입주자격도 없어 불안한 하루를 견디고 있다 . 주민들은 십 수 년이 지나는 동안 이주해서 먹고살 경제활동의 기회도 근력도 사라져버렸다며 한걱정이었다 .
댐 건설 이후 10년 간 마을에 남아있었던 김영복 어르신은 이주단지로 옮겨갈 계획이다. 김영복 어르신 (83) 은 수확이 끝난 들에서 아궁이 불로 쓸 깻단을 묶어 리어카에 싣고 계셨다 . 어르신은 구들과 기름보일러로 겨울을 난다 . 깨를 털어낸 대는 불이 되고 볏짚은 사료가 된다 .
버릴 것 하나 없는 이 들이 조만간 물에 잠길 걸 생각하면 어르신은 마음이 뻥 뚫린 것 같다 . “ 이주단지로 가려고 . 이 나이에 객지에 나가 고생하느니 고향에 있는 게 낫겠지 .
이미 떠난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는데 못 떠나고 기다린 사람들은 10 년 동안 다 까먹었어 .” 이주예정지는 마을을 기준으로 좌우 3 군데에 나뉘어있다 . 어르신이 이주예정지라고 가리킨 곳에는 흙과 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논이며 밭이 들어설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
어르신은 “ 설혹 땅이 있다 해도 나이가 들어 농사를 짓기는 어렵다 ” 고 말했다 . 몇 해전만해도 함께 들에 나왔을 아내 손기순 (80) 어르신은 이미 건강을 해쳐 집에 계셨다 . 손 어르신은 운주 산북 출신으로 24 살에 광두소로 시집을 왔다 .
2016 년 마을을 기록한 책자 ‘ 광두소 마을이야기 ’ 속에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외모가 마음에 들어 시집왔다는 속마음을 살짝 내비쳤었는데 그런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깊이 내려앉았다 .
대전을 오가며 배추농사를 짓는 최랑규, 한귀례 부부 배추밭에서 만난 최랑규 (78), 한귀례 (75) 어르신은 대전에서 오가며 농사를 짓고 계시다 . 최 어르신은 이곳이 고향이고 한 어르신은 논산 양촌에서 시집왔다 . 부부는 댐 건설 추진 전에 이주했지만 땅을 내놓은 건 그 후였다 .
농업용수가 필요하다는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놓았다고 했다 . “ 고향이 사라진다니 천지개벽 되는 거지 .
그전에 대청댐 수몰민들에게 천지개벽돼 나온 사람들이네 하고 우스갯소리 했는데 지금 내가 그 처지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 두 분은 올해 이곳에서 1800 여 평의 농사를 지었는데 홍수로 피해가 컸다 . 그래도 농어촌공사의 땅이어서 보상받기는 힘들다 .
한 어르신은 “ 억울하니 죽자 살자 농사만 짓는 것 ”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마저도 언제 못하게 할 지 알 수 없다 . 이미 농사짓지 말라는 현수막을 내건 건 오래전 일이다 . 그래도 봄이 오고 꽃이 피고 광두소 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는데 바로 ‘ 제자리 색시 ’ 다 .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그럴듯한 말이라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 그 마을에 태어나 그 마을 총각과 결혼한 사람을 제자리 색시라 불렀는데 유난히 광두소에는 제자리 색시가 많았다 . 그만큼 산이 높고 골이 깊었다는 방증이다 .
최복순 (86) 어르신도 마을총각 강경원 (86) 어르신과 결혼한 제자리 색시다 . 집을 찾았을 때 최 어르신은 몸에 탈이 나 쉬고 계셨다 . 덕장에서는 곶감이 바람을 맞고 있었다 . 두 분이 함께 따서 깎아 말리고 있는 감이다 .
어르신들은 “ 늙은이들을 잊지 않고 찾아와줘 고맙다 ” 며 5 년 전 그날처럼 감을 내오셨다 . “ 단감이 이렇게 짤어 . 맛은 좋은데 .” 제자리 색시인 최복순 어르신과 강경원 어르신이 대문을 나서고 있다.
두 분은 전주 외곽에 집 한 채 장만해놓으셨는데 고향에 남을지 떠날지 아직까지 결정을 못했다 . 계속되는 일정지연에 언제 이주할지 알 수 없는 일이라 구체적인 계획도 못 세우고 있는 형편이다 . 집 돌담이 예뻐 그곳에서 사진을 찍기로 하고 나오니 문밖에 매실나무가 보였다 .
5 년 전 그 나무아래에서 할머니가 민들레를 캐고 계셨다 . 김광준 이장의 고향도 이곳이다 . 그는 지지부진한 이주계획에 못내 답답해하고 있었다 . “ 내년 봄부터 이주단지를 건립한다는데 하도 미뤄 와서 믿들 못해요 . 지켜보는 거죠 .
싸게 줘야 할텐데 .” 이장님 말씀에 의하면 5 년 사이 돌아가신 분도 있고 떠난 분도 있었다 . 한란수 (78) 어르신도 몸이 안 좋아지셔서 대전에 가 계신다고 했다 . 우리는 그분이 보물처럼 아끼던 100 년 된 친정엄마의 약 간장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
2015 년 완두콩 4 월호에 ‘ 광두소의 삶은 계속된다 ’ 고 썼다 . 2020 년 12 월에 만난 광두소의 삶도 계속되고 있다 . 버스가 끊겼지만 마을주민이 개인차로 이웃들을 실어 나르고 밭에는 배추가 , 처마 밑엔 곶감이 작년처럼 익어가고 있다 .
해마다 자식들이 몰려와 김장을 해가고 60 여 년 전 논 두 마지기를 기부하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마을제사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삶이란 물줄기는 댐으로 가둘 수 없는 것이어서 땅이 물속에 가라앉는다 해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 덜 흔들리고 덜 고단하기를 바라지만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 .
광두소의 새 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올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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