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로 자식들 키우고..."이제는 나 의 삶 살고파" 30여년 역사 뒤로 하는 삼례 시장수선 빛이 잘 들지 않아 한낮에도 시장 거리는 어둡다 . 셔터를 내린 여러 개 상점의 연이은 풍경 속에 ‘ 수선 ’ 이라 적힌 빛바랜 간판의 노란색 빛이 눈에 밟힌다 . 이곳은 삼례시장의 한 골목 .
삼례시장은 오래된 시장을 현대화시키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 마지막 남아있는 상점들은 이달까지 짐을 뺀 후 사업이 마무리 되면 다시 현재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 시장에서도 안쪽 골목에 위치한 , 옛 간판을 내건 마지막 상점 중 하나인 ‘ 시장수선 ’ 최효선 (59) 씨 .
그는 서른살 되던 해 , 이 자리에서 바느질을 시작했다 . “ 이 시장거리의 1 세대들은 많이 돌아가셨어 . 우린 2 세대라고 보면 돼 . 이 건물이 건축되어진지는 45 년 , 50 년 정도 됐을걸 .
여기가 원래 이불집 이었는데 그 할머니가 나한테도 참 잘해주셨지 .” 지금은 장날 푸성귀를 파는 어르신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골목 풍경의 전부지만 과거에는 이 골목은 수많은 옷집이 모여 있는 곳 이었다 . 지금말로 표현하면 의류 특화 거리 정도 될까 . 효선씨의 표현을 빌리면 ‘ 명동 1 번지 거리 ’.
“ 그때만 해도 저 우성아파트 한 채 가격이 3,500( 만원 ) 정도 됐어 . 근데 여기가 5,000 인가 그랬던 거 같아 . 권리금이 어마어마했지 . 그때는 이 거리가 명동 1 번지였어 . 지금은 재래시장 다 죽고 뒷골목이 됐는데 그때는 최고의 상권이었지 . 아 , 날 새워 바느질했다니까 .
밥 먹을 시간도 없었어 . 어마어마하게 옷가게가 많았지 여기에 . 신발집도 있고 . 옷가게 있으니까 내가 여기 들어왔어 .” 시장수선을 오래토록 지켜온 낡은 재봉틀 등. 당시에 이 거리에는 수선집이 2 곳 있었다 . 지금은 신시장과 구시장거리에 여러 개의 수선집 , 세탁소가 있다 .
“ 그땐 수선집이 2 개 있었어 . 그 아저씨는 돌아가셨어 . 재작년에 . 친하게 지냈거든 . 돌아가셔서 많이 울었지 . 지금은 이쪽이랑 구시장에도 수선집이 여러개 있어 . 세탁소도 있고 . 근데 나는 그런 거 연연하지 않아 .
나는 나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 .” 바느질 학원을 다니고 책을 보고 익힌 기술로 효선씨는 아이들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친정어머니를 모셨다 . 그래서 바느질과 이 시장거리는 그에게 ‘ 감사한 곳 ’ 이다 . “ 수선이라고 우습게 생각하면 안돼 . 수선이 오히려 더 어려워 .
사람 체형에 따라서 , 취향에 따라서 해줘야 되니까 쉬운 게 아니야 . 고맙지 이 자리가 감사한 자리지 . 난 누가 뭐하냐고 물으면 바느질쟁이라고 해 . 바느질하면 즐겁잖아 .
이쁘게 해서 걸어놓으면 그게 허투른거지만 작품처럼 보이기도 하고 .” ‘ 바느질쟁이 ’ 의 자부심으로 고친 옷과 착한 심성으로 만나온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을 찾는다 . “ 비싼 옷은 함부로 못 맡기니까 이리로 와 . 그런 사람들 믿음 때문에 내가 가게를 못 닫지 .
그 사람들도 다 젊은 엄마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파파할머니들이 됐어 . 그 사람들 보면 세월이 흘렀구나싶어 . 나도 많이 늙었구나 싶고 .” 수선집을 시작할 때 직접 짰던 가구와 낡은 공간은 이제 사라지지만 수십년째 잡고 있는 그의 분신 같은 바늘과 가위 , 재봉틀은 여전히 함께 한다 .
“ 지금 나도 짐 싸고 있어 . 하나씩 들어 나르고 있지 . 내가 요새는 고산에서 해설사 공부를 하거든 . 지금까지 열심히 애들 갈치고 가족을 위해서만 살아왔잖아 .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아보려고 .” 수십년을 함께 장사해온 이웃상인과 함께. 그의 직업은 다섯 손가락으로도 다 셀 수 없다 .
농부 , 바느질쟁이 , 식당 주인 , 문화해설사 , 학생 , 엄마 , 할머니 , 아내 … . 한참 날을 새고 바느질을 하던 그 젊은 여자는 이제는 노년을 준비한다 . “ 무작정 늙는 게 좋은 게 아니야 .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 그것이 내 요즘 관심사야 .
주저앉지 않고 나를 위한 삶을 살아보려고 . 그렇게 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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