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한 시절이라도 문득 옛날이 그리워 구멍가게 인수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이제는 한글공부 꿈도 이뤄 지난 4 일 오후 , 옛 공소 터 옆집 .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당에 핀 꽃들이 보였다 . 이날 성당에 다녀온 박명선 (81) 할머니는 꽃무늬 블라우스를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
오랜만에 내린 햇볕에 참깨와 옥수수를 널어놓으며 어린 객을 집안으로 맞이했다 . “ 내가 혼자 있으면 잘 안 먹게 되더라고 . 이것 좀 잡숴봐 .” 수박을 내오시던 할머니는 뭔가 부족해 보였는지 천마주스에 곡물을 섞어 건네주셨다 .
다리목마을에서 나고 자란 명선 할머니는 스물일곱에 결혼하면서 이곳을 떠났다 . 송광사 근처마을에서 지내다 전주로 이사 갔고 2002 년도에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 “ 고향은 떠났어도 친정집에 왔다 갔다 하면서 몇 번씩 왔었죠 .
근데 구멍가게 하시던 할머니가 자리를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거 한 번 해보고 싶더라고 . 그때 다시 돌아왔어요 .” 그렇게 할머니는 마을회관 옆에 있던 구멍가게 주인장이 되면서 마을로 돌아왔다 . 이전에는 아파트에 살면서 시골 분위기가 그리웠더랬다 .
고향에 돌아온 지도 어느덧 18 년 된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궁금했다 . “ 나 어렸을 땐 힘들고 무서운 일들이 참 많았어요 . 일본 정치 때는 군화발 싸매고 높은 모자 쓴 일본 놈들이 와서 집안 세간살이 다 가져갔죠 . 6.25 전쟁터지고 나서는 주변에 빨치산이 어찌나 많았는지 .
노적골 사는 우리 외숙모도 총 맞아서 돌아가셨어요 .” 할머니가 기억하는 옛날은 어둠 그 자체였다 .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연이어 겪었으니 오죽했겠나 . 주변에는 억울한 죽음이 비일비재했고 어둑어둑해지면 총성 소리에 밤을 지새웠던 때였다 .
게다가 어려웠던 시절 탓에 학교를 다니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고 . “ 입학하려고 접수까지 다 해놓았는데 전쟁이 터져서 학교에 못 갔어요 . 특히 우리 또래들 중에 학교 못 간 사람들이 많죠 .
그뿐 아니라 시골에서 맨 날 일해야지 애 봐야지 바빴죠 .” 두 번의 어려운 시기가 지나고 , 할머니 집안에도 안정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 당시 명선 할머니네 아버지께서는 마을에 한지 장판공장을 크게 차렸다 . “ 그때 마을 사람들 여럿이 우리 공장에서 종이 뜨고 한지 만들었어요 .
우리 집이 이 동네서 둘째가라면 서운한 부잣집이었죠 . 아버지가 자전거 타고 전주 가서 없는 것 없이 다 사가지고 왔는데 그 당시 집안에 축음기도 있었어요 .” 너도 나도 고생하면서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었던 시절 . 할머니는 그때가 문득 생각나고 그립다 하신다 .
“ 보리 갈아서 죽 끓여먹고 배고팠어도 마을 분위기가 참 좋았다 ” 고 말이다 . 완주군 진달래학교를 다니며 한글을 배웠다는 할머니가 학교에서 받은 상장과 시화집을 보여주셨다 할머니 인생에서 못내 이루지 못했던 꿈이 있다면 바로 글공부였다 . 그런 할머니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
“5 년 전엔가 면사무소에서 할매들 글 갈쳐준다고 하더라고요 . 그때부터 글 배우기 시작했는디 첨엔 집에 오면 다 잊어버리고 글씨 쓸라면 손에 쥐나고 힘들었어요 .” 나이가 들면서 희망도 , 인생의 재미도 점차 사라졌다던 할머니 .
완주군 성인문해 진달래학교에서 글을 배우고부터는 목표가 생기고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도 생겨났다고 . “ 나 갈쳐준 선생은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고 했는디 어찌나 예쁘게 쓰고 싶었던지 .
손이 말을 안 들어도 쓰고 또 쓰니께 쪼매 나아지더라고요 .” 진달래학교 얘기가 나오자 , 안방에 있는 졸업사진과 작품집을 꺼내 보여주시는 명선 할머니 . 학교 다니면서 받은 상장에는 개근상 , 졸업장 , 초등학력인정서 , 시화전 장려상이 있고 시집에는 할머니가 꾹꾹 눌러 담은 글자가 있었다 .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 문장마다 오색찬란하게 물들인 글 아래엔 좋아하는 꽃 그림이 가득했다 . “ 인제 졸업했는데도 자꾸 미련이 남더라고요 . 학교에서 소풍도 가고 그림 잘 그린다고 칭찬도 많이 받아서 좋았는데 말예요 . 지나간 시간들이 꼭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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