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남마을 옛이야기 용의형상 끊기니 핏물처럼 흙물 토해내 둥구나무 아리따운 안남마을 안남 ( 雁南 ) 이라는 이름은 마을 지세가 기러기가 남쪽을 향하여 날아가는 듯한 모양새라 하여 지어졌다 .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정경운이 남긴 『 고대일록 』 에도 1598 년의 안남마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 3 월 20 일 을사 ( 乙巳 ) 해가 저물녘 〔 哺時 〕 에 안남 ( 雁南 ) 마을 에 도착했다 .
그 동쪽에는 정여복 ( 鄭女復 ) 의 새로운 집이 있는데 , 산천이 특이하게 빼어나며 , 주위 사방이 마치 껴안는 듯하니 참으로 빼어난 경치가 있는 곳이다 . 촌가 ( 村家 ) 에서 잤다 .
- 정경운 ( 鄭慶雲 ), 『 고대일록 ( 孤臺日錄 ) 』 제 3 권 무술 ( 戊戌 , 1598) 에서 발췌 - 과거에는 제법 마을이 컸다 . 이길순 (82) 할머니는 “ 산 좋고 물 좋으니 공기도 좋아서 살기 참 좋다 . 마을이 엄청 컸다 .
옛날에는 사람도 많아서 윗동네 , 아랫동네 , 장덕 이렇게 불렀다 . 장덕에는 장도 서고 그랬다 ” 고 회상했다 . 느티나무 아래에는 주막이 , 뒷산에는 가마터와 봉수대 마을에는 주막이 2 개 있었다 . 소순덕 (77) 할머니는 “ 마을에 주막이 두 갠가 있었다 .
그 중에 하나가 동구나무 쪽에 있었다 . 오두막집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막걸리를 마셨다 ” 고 말했다 . 마을 뒤쪽은 북송골 장덕리로 조선시대 백자 가마터가 있었다고 알려진다 . 가마가 2 기나 되고 그릇을 사고파는 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
또 뒷산에서 가장 높은 각시봉에는 현재도 봉수대가 남아있다 . 봉수대는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해 불을 피워 중앙에 소식을 전하는 용도였다 . 마을의 봉수대는 인근의 기린 봉수와 운암산의 관봉 봉수대를 잇고 있다 .
옛날에는 마을에서 정월대보름 지신밟기를 할때 각시봉 봉수대까지 올라서 굿을 하고 내려왔다 . 마을 초입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조선시대에 심어진 당산목으로 추정된다 . 수명은 200 년 이상 , 평균 높이 30 미터 , 둘레만 해도 3 미터가 넘는다 .
쌍바우에서 돌이 떨어지면 초상이 난다 “ 쌍바우에서 돌이 굴러 떨어져서 물에 ‘ 풍덩 ’ 하고 빠지면 초상이 났어 .” 안남마을의 긴 역사를 대변하듯 마을 어르신들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다 . 쌍바위에서 고산천으로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
마을 입구 느티나무 뒤로 보이는 산에는 도로가 나면서부터 젊은 남자가 죽는 일이 많아 마을에 과부가 많아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 설명은 이렇다 . 산새가 용의 형상을 닮아 과거 마을사람들은 산을 끊어 산길을 내면 안 된다고 했지만 새마을운동 때 길을 낸 것이다 .
그때 마치 핏물처럼 흙물이 쏟아지고 이후로 마을이 시끄러워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 마을 뒷산에는 ‘ 고려장 터 ’ 였다고 전해지는 굴도 여러 개 있다 . 유영식 이장은 “ 어린 시절 장난삼아 들어갔다 나오느라 애먹었다거나 하는 얘기도 들었다 ” 고 말했다 .
안남마을 세시풍속 한편 안남마을은 전통을 이어 1 년에 크게 2~3 차례 세시풍속을 이어가는 동제와 잔치가 열린다 . 당산제 , 단오 , 칠석 , 백중이 그것이다 . 특히 올해부터 정월대보름에 당산제를 크게 지내기 시작했다 . 단오에는 둥구나무에 그네를 걸어놓고 타고 ,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다 .
마을사람들이 한데모여 회관에서 음식을 마련해 나눠먹는다 . 칠석이나 백중에는 돼지를 잡아 한바탕 마을잔치를 벌인다 . 벼내기를 준비하고 하루 놀고 쉬면서 한해 농사의 수고를 위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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