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인심 다시 살아나야 해" 나고 자란 고향이라 적응시간도 필요 없이 모든 게 금방 익숙해져 기온이 높아지면서 길가엔 벚꽃잎이 흩날리고 논밭에는 작물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 동시에 반갑지도 않은 잡풀이 수북하게 자라 농부들의 손길을 더욱 바쁘게 만든다 .
마을길 따라 안쪽에 위치해 산을 등지고 있는 집에 사는 이경배 (74) 어르신도 마찬가지였다 . 경배 어르신은 “ 그새 풀이 많이 자라 가지고 일단 손으로 풀 좀 뜯어놓고 있다 ” 며 웃었다 . 타향살이의 귀향 경배 어르신의 어린 시절은 당시 누구나 그렇듯 고단했다 .
먹을 것이 없어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겨웠다 . 그 어떤 것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이었다 . “ 마을에 있는 비봉초등학교 나왔어요 . 중학교는 8 ㎞ 걸어서 고산 , 봉동으로 가야 했어서 우리 때는 밥 좀 먹는 집안에서만 중학교 보냈죠 .
어렸을 때 못 배운 게 한이 됐어요 .” 그는 전주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1978 년도에 서울로 상경했다 . 서울에서 시작한 일은 시내버스 운전이었다 . 시내버스 구간별로 운전기사가 배정되는데 경배 어르신은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다니는 구간 , 영등포와 역전으로 돌아오는 구간을 달렸다 .
30 여 년 동안 버스를 운행한 어르신은 정년퇴직하고 10 년 전에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 “ 이 집이 부모님이 살았고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 타향살이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을 거예요 . 지역을 떠나더라도 고향에 대한 향수는 항상 가지고 있거든요 .
저 같은 경우에는 직업병으로 몸도 안 좋아져서 맑은 공기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있어요 .” 고향 집을 되찾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 그가 서울에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집이 팔려서 다시 매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기다림 끝에 기회는 찾아왔다 .
그가 이서에서 3 년 동안 아파트 생활을 한 뒤에 현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다른 지역 같았으면 적응하는데 시간이 따로 걸릴 텐데 여기는 제가 나고 자란 곳이라 따로 정 붙일 시간이 필요 없었어요 .
그래서 모든 게 금방 익숙해지더라고요 .” 예전 같지 않은 시골인심 시골에서의 정착은 곧 농사로 귀결된다 . 크든 작든 남는 땅에 농사를 짓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 경배 어르신은 크게 농사를 짓진 않지만 마당에 아담한 텃밭을 꾸몄다 .
복숭아 , 대추 , 사과나무 몇 그루가 있고 곧 밭을 갈아서 땅콩을 심을 참이다 . 형제처럼 지내는 유희남 어르신이 밭 한가운데에 있던 사과나무를 옮겨 심어주고 있다. “ 가을에 오면 뭐라도 줬을 텐데 지금은 먹을 게 없네요 .
제가 먹으려고 심어놓은 것보다는 오다가다 누가 우리 집 오면 따먹으라고 놔두는 거죠 .” 어르신은 요즘엔 시골인심도 각박하다며 잠시 푸념했다 . 이웃이 뭘 하든 신경도 안 쓰는 세상이 되었다며 말이다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제처럼 지내는 이웃 동생 류희남 (71) 어르신이 찾아왔다 .
세 살 차이 나는 두 사람은 살뜰하게 서로를 챙긴다 . 희남 어르신은 도라지가 들어간 배즙을 건네며 농약 뿌리는 기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 곧이어 마당 한가운데에 있어 골칫거리였던 사과나무를 가장자리로 옮겼다 . “ 제가 힘이 들어서 일을 못 하니까 이렇게 와서 도와주고 그래요 .
가까이서 가족처럼 돕고 사니까 시골이 사람 살기 좋아요 . 앞으로 우리 마을에 타향 사람들도 많이 들어와서 동네가 더 살아났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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