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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2021.01.18

대부산 아래 학동마을

학동교회 장영선 장로

마을과 사람, 계절과 공동체의 시간을 깊이 있게 기록하는 완두콩의 기획 기사 모음입니다.

등록 2021.01.18 14:20 조회 3,26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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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교회 주민들이 벽돌 날라 다시 지어 ■ 힘든 시절을 견디게 한 신앙 학동교회 장영선 (85) 장로는 5 대째 학동마을에 살고 있다 . 자식들 교육 때문에 전주와 마을을 오가기는 했지만 마을을 떠난 적은 없다 . “ 어릴 때는 마을에 전기가 어디 있고 버스가 어디 있고 전화가 어디 있었겠어요 .

길도 없었는데요 . 그때야말로 동상면은 대한민국 8 대 오지였죠 . 제가 5 학년 때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 그때 아버지가 인민군한테 학살을 당하셨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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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장례를 모시고 온 가족이 봉동에서 3 년간 피난 생활을 했어요 .” 수복 이후 마을로 다시 돌아온 장 장로는 그때부터 마을과 지역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했다 . 대통령 선거인단 , 평화통일 정책자문위원 , 동상면 지역발전위원장 , 완주군청 자문위원 등 맡아왔던 직책도 많다 .

“ 마을을 떠날 새도 없었고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 성년이 되고 지역사회를 위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 마을의 발전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죠 .” 장영선 장로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장 장로는 나이 서른에 학동교회 장로를 맡았다 .

67 년부터 지금까지 50 여년이 넘도록 교회와 교인들과 함께 하면서 교회의 역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봐온 셈이다 . 한국전쟁 이후 마을의 모든 집들이 전소되고 교회 역시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을 때도 온 마을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집보다도 교회를 짓는 데 먼저 나섰던 걸 기억한다 .

“ 교회가 불에 타서 처음에는 선교사가 쳐준 텐트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어요 . 자신들이 살 집도 다 불에 탔는데 주민들 모두 나무를 베고 짊어다가 목조 건물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어요 .

지금은 상상도 못할 노력이었죠 .” 이후에는 나룻배를 타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하나 빠지는 사람 없이 벽돌을 옮겨 지금의 교회를 만들었다 . 그때 장 장로는 20 대 젊은 청년이었다 . 다들 먹고 사는 게 힘든 시절이었지만 주민들에게 신앙은 큰 힘이 됐다 . “ 그때만 해도 다들 초가집에 살았죠 .

그런 시절에 동네에 붉은 벽돌 교회가 생긴 거예요 . 하루하루 벽돌을 쌓아올리고 교회가 지어졌어요 . 달밤에 나가서 교회를 바라보며 기쁨에 넘쳤던 기억이 나요 .

늦은 봄에 완성이 됐죠 .” ■ 산간벽지 삶에도 감사와 축복을 학동교회는 한국전쟁 이후 수 십 년간 단 한 번도 예배를 쉬어본 적 없지만 최근에는 코로나로 2 주 가량 예배를 쉬고 있다 . “ 코로나 때문에 주일에 못 모였어요 . 예전처럼 기독교가 박해받는 상황이라면 절대 쉬지 않고 싸우겠죠 .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 서로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조심해야죠 .” 장 장로 집 안 거실에 걸려있는 사진 액자. 주민들이 고령화되고 젊은 사람들은 외지로 나가면서 교회에 오는 사람도 줄었지만 최근에 몇 가구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 장 장로는 든든하다 .

“ 젊을 땐 누군가는 지역에서 활동을 해야 발전이 된다고 생각해서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 저보다 훨씬 열심히 하셨던 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말 하는 자체가 부끄럽네요 .

신앙이 마을 사람들을 단합시키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거 같아요 .” 장 장로는 ‘ 자기본심 ’ 을 지키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 그리고 삶에 대한 감사도 . “ 하나님이 주시고 부모에게서 받은 자기 본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 .

세상에 나와서 이런 벽지에서 살았지만 전 축복받은 삶을 산 거 같아요 .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목사님 , 교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장로로 지내왔다고 생각하거든요 .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

현장 사진

학동교회 장영선 장로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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