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 30년에 유원지와 감나무까지 쉼 없이 굴러간 삶 방앗간 세월 30년 홍영애 어르신 마을에서 제일 늦게 감을 딴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안쪽 황골유원지로 향했다. 마당 한켠 감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자리, 홍영애(79) 어르신이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쑥 찾아든 객에게 어르신은 따뜻한 미소로 자리를 내주셨다. “여섯 남매 중 맏이였어. 맨날 동생들 보라고 학교 못 가게 했다니까. 공부가 하고 싶어서 나중엔 아기를 업고 학교에 가서 옆자리에 앉혀두고 공부했지.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장을 겨우 땄어.” 영애 어르신은 자식들만큼은 어떻게든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연년생 다섯 남매 수업료를 챙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마을 앞 장선천과 양촌을 오가며 잡은 다슬기를 팔아가면서까지 해냈다. 그는 “다 대학까지 보내서 가르친 게 큰 보람”이라고 웃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운주면소재지 농협 앞에서 30년 넘게 방앗간을 운영했다. 떡메가 부서질 정도로 일했고, 손에는 쌀가루가 굳은살처럼 남았다. 밥 먹을 틈이 없을 정도로 방앗간이 잘됐다. 기계가 멈추지 않는 새벽부터 찐 바람떡을 도시락 대신으로 아이들 손에 들려 보내기도 했다.
영애 어르신은 “양촌고 다니던 셋째 딸은 친구들이 좋아한다고 꼬박 챙겨가는데, 둘째는 창피하다며 절대 안 가져갔다. 그마저도 지금 돌이켜보면 다 추억”이라고 회상했다. 몸이 아픈 이후로는 시동생에게 방앗간을 물려주고, 남편의 고향인 덕동과 가까운 원장선마을로 이사 왔다.
이곳에서 시부모, 여섯 시동생과 함께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살았다. 어르신의 남편은 젊은 시절 광산에서 일한 영향으로 병을 얻었고, 8년 전 세상을 떠났다. 진폐로 오랫동안 고생하던 남편을 떠나보낸 뒤 함께 관리하던 유원지와 감나무를 홀로 감당할 수 없어 외지인에게 세를 주거나 팔았다.
예전처럼 일하지 않아도 어르신은 여전히 바쁜 사람이다. “난 집에 별로 안 있어.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거든. 등산도 가고, 노래교실도 가고, 가까운 곳에 축제 열린다고 하면 거기도 가지.
저번 주엔 큰 딸이랑 손녀랑 익산 국화축제 다녀왔어.” 손녀가 챙겨온 귀여운 파자마를 맞춰 입고 찍은 사진을 자랑하는 어르신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연했다. 내년 팔순을 앞둔 어르신은 자식들과 함께 고향에서 잔치를 열 예정이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어.
힘들게 살았지만 덕분에 아이들도 잘 컸잖아.” 영애 어르신의 삶은 오래된 방앗간의 소리처럼, 멈춘 듯 이어지고 있다. 배움의 한을 희망으로 바꾸고, 눈물 속에서도 가족의 밥 짓던 손은 지금도 여전히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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