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일곱 둔 딸부잣집 구연락·김이평 부부 여든일곱, 여든셋에 여전히 연인 같은 눈길 구연낙 (87)- 김이평 (83) 부부에게는 딸이 많다 . 딸만 일곱 . 부부에겐 첫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이 있지만 부부는 아픔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 다만 침묵 . 세월이 가도 무뎌지지 않는 아픔도 있다 .
그것이 자식을 잃은 부모가 짊어진 무게다 . “ 딸이 일곱이여 . 아들 낳을라고 계속 낳았는데 딸만 나왔어 . 아 옛날에는 나이 팔십까지 자식 낳았다 안혀 . 딸이 많으니까 좋아 . 엄마아버지가 작아서 가들도 다 작아 .
아들 같으면 부모한테 손도 벌리고 헐턴데 딸들은 안해 .” 이평 할머니는 열아홉에 화산면에서 인력거를 타고 안남마을로 시집왔다 . 그때 연락 할아버지 나이가 스물셋 . “ 사진만 보고 중매결혼왔지 . 아저씨가 해병대였어 . 각진 모자 쓰고 사진에 박혀있는데 멋졌지 .
결혼날이 섣달 ( 음력 12 월 ) 이었어 . 눈이 엄청 왔어 . 겁나게 추운데 우리 할아버지랑 저쪽 할아버지는 걸어서 왔고 내우간만 인력거를 탔어 . 우리만 .” 김이평 할머니가 구연락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며 머리를 만져주고 있다. 노부부의 따뜻한 손길.
연락 할아버지는 44 개월간 군생활을 했다 . 전국을 돌아다니며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 그 시절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끝이 있었다 . “ 내가 진해 쪽에 있었을 때여 . 내가 아버지한테 ‘ 장가가야것다 ’ 그 말 했더니 군대로 편지랑 사진이 왔네 .
내가 소대장한테 사진을 보여줬지 . 그러니까 소대장이 휴가증을 주면서 돈을 좀 주더라고 . 결혼 잘하라고 . 나는 여태껏 그 보답도 제대로 못했어 . 고작 곶감 열 개를 묶어 준 거 그거밖에 없어 .” 먹고 살기 퍽퍽했던 시절 . 그래서 사람들은 더 바지런했고 몸이 축나는지도 모르게 일했다 .
부부도 그랬다 . 이제는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지만 부부에겐 바지런함이란 ‘ 인 ’ 이 박혀버렸다 . 부부는 이날도 새벽 5 시에 일어나 이른 아침을 먹고 논에 나가 일을 했다 . “ 아저씨가 먹는 건 잘 먹어도 뼈가 아파서 지팡이를 짚고 댕겨 . 젊어서부터 일을 많이 하셨어 .
군인이었으니까 게다가 해병대였잖어 . 그땐 안 맞으면 잠을 못 잤대 . 이제 일 못한다고 맨날 말은 하는데 그래도 일을 해 .” 부부는 ‘ 이제 아파서 일 못해 ’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말과는 달리 몸은 습관처럼 논과 밭으로 향한다 . 손에는 오래된 지팡이를 들고 .
“ 고추를 심었는데 원체 가물어서 … . 비 안 오면 못 먹게 생겼어 . 주말에 비가 온다는데 월매나 오것어 . 우리는 시대를 잘못 태어났어 . 그때는 여자들은 시집살이도 심했고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고 일도 많았잖어 .
자식 키우고 고생했던 건 말하면 끝도 없지 .” 사이좋게 산책을 하는 노부부 부부는 사이가 좋다 . 스스럼없이 손을 맞잡고 부끄럽지만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 고된 세월을 온몸으로 함께 겪어낸 뜨거운 전우이자 아이들의 부모이자 사랑하는 사람 . “ 이 마을에는 다들 나이 먹고 혼자 된 사람들이 많어 .
우리 또래 중에는 우리만 부부가 함께 살어 . 다들 먼저 가셨어 . 우리 아저씨가 젊을 땐 다정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나이 먹고 귀 먹고 한 게 고함 지르고 해서 다투기도 해 .”( 이평 할머니 ) “ 우리는 나이를 많이 먹어서 이제는 죽는 게 제일 큰일이야 .
사우들도 딸들도 우리 하루라도 더 살게 하려고 약이며 뭐며 다 사오고 참 잘혀 . 내가 우리 안사람한테 나 죽으면 싸게 따라오라 했어 .”( 연낙 할아버지 ) ‘ 죽는 일 ’ 이 그들이 치러야 할 가장 큰 일이라는 노부부 .
논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골목길에서 기다리는 이평 할머니의 얼굴에서 감히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세월이 보인다 . ‘ 죽을 만큼 힘들다 ’ 면서 , 그럼에도 살아지는 나날들을 지내온 그들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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