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집은 빙 둘러 제법 넓은 밭이 있다. 집 앞마당에는 마늘, 양파, 배추 등 김칫거리를 심고 계단을 올라 대숲이 둘러싼 밭에는 들깨, 참깨, 감자, 시금치, 고추를 심는다. 집과 한몸처럼 어우러진 할머니는 봄 준비가 한창이다.
할머니의 오래된 집 1 부 할머니의 유년시절 이야기 - 이서 갈동마을 김양금 할머니 “ 살림하는가 ?” 김양금 할머니는 대뜸 나에게 물었다 . 어르신들을 만나면 보통은 시집은 갔는가라고 묻지만 할머니의 질문은 신선했다 . 부모님 집에서 나와 내 살림을 십년 넘게 꾸려오고 있기 때문에 “ 예 .
살림합니다 .” 라고 답했다 . 해는 길어졌지만 바람 끝은 여전히 차다 . 한참을 밭에 앉아 무얼 하시나 했더니 한 소쿠리 캐온 시금치를 봉지에 꾹꾹 담아 내 손에 들려주신다 .
“ 삶아서 마늘 갈아 넣고 간장으로 간해서 참지름 둘러서 무쳐 먹어봐 .” 아궁이가 건재한 부엌 할머니의 농사도구와 고무신 할 머니 집을 빙 둘러 제법 넓은 밭이 있다 .
집 앞마당에는 마늘 , 양파 , 배추 등 김칫거리를 심고 계단을 올라 대숲이 둘러싼 밭에는 들깨 , 참깨 , 감자 , 시금치 , 고추 등 심는다고 하신다 . 7 년 전까지는 쌀농사도 혼자 지으셨는데 이제 쉬엄쉬엄 밭농사만 짓는다고 하신다 . 쉬엄쉬엄이 이 정도다 .
“ 집은 이렇게 생겨먹었어도 땅은 있으니까 . 아프고 나서는 논농사는 못 지어먹어 . 전에는 논농사 지어서 애들 쌀 보내주고 그랬지 . 밭농사는 안 놓았어 . 작년에 입원하느라 1 년 묵혔지 그 뒤로는 다시 밭농사 짓지 . 자식들 줄려고 짓는 농사지 . 나 혼자 먹을 라고는 안 짓지 .
애들 먹이려고 .
김장할 때는 애들이 인천에서 다 내려와 .” 김양금 할머니가 캔 시금치 집보다 높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텃밭에서 시금치를 캐 내려오는 할머니 김양금 할머니는 1939 년 김제 검산리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이서면 갈동마을 ( 할머니 시집오실 당시에는 치릇마을이라고 불렀다 .) 이대독자 손 귀한 집으로 시집오셨다 .
육남매를 낳고 서른일곱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 마흔 일곱에는 첫째 딸에게 아이들 맡겨두고 혼자 인천으로 돈 벌러 떠났다 . 자식들 장성해서 시집 장가보내고 살길 찾아갔다는 생각이 드니 예순다섯 무렵 , 혼자 이 마을로 돌아왔다 .
스무 해 가까이 버려져 있던 집은 댓돌 앞까지 대숲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 다섯 달 동안 매일 낫과 톱을 들고 혼자 힘으로 대나무를 잘라내고 모아서 불태웠다 . 땅을 북돋아 밭을 만들었다 . 식어있던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 아이들 키우며 살던 그 집 .
족히 이백년은 되었다는 그 집에서 김양금 할머니의 살림은 다시 시작된다 . 오래된 흙집과 자신이 일군 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 할머니의 형형하던 눈빛이 생각난다 . 오래된 집 마루에 앉아 , 밭에서 함께 쪼그리고 앉아 들었던 할머니의 오래 묵혀 둔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
집앞에 선 김양금 할머니 온 동네 사람들이 뽕밭에서 일을 했지 할머니 나이 7 살에 해방이 돼서 온 동네 사람들이 김제역으로 몰려나와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한다 . 할머니 살던 검산리는 600 가구 넘게 사는 제법 큰 동네였다 .
해방되기 전 이 마을에는 일본인 가구 수가 5~6 가구 정도였고 대규모 과수원이나 거대한 잠종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 “ 어렸을 때 기억이 어렴풋이 나 . 우리 동네에 일본사람이 겁나게 살았어 . 우리 친정엄마가 일본 사람네 누에 키우는 거 일하러 갈 때 나도 따라가서 일본사람 아기 돌봐주기도 했어 .
애기가 애기를 돌 본거지 . 일본사람들 기모노 옷이 기억이 나 . 뒤에 보따리 같은 것이 ( 오비 ) 달려있지 . 일본 사람들 뽕밭이 겁나게 크게 있었어 . 그러니까 우리 동네사람들이 거기서 일을 많이 했지 . 아저씨들이 오두개 열렸다고 우리 꼬마들보고 따먹으라고 알려줬어 .
아저씨들은 뽕나무 쳐서 지게에 지고 가서 부려놓으면 여자들은 갈무리해서 누에 밥으로 주고 . 참 큰 창고 ( 잠종장 ) 였어 .” 다섯 살 무렵 뽕밭에서 놀던 그 시절이 왜 그리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을까 . 오두개가 참 달아서 였을까 .
어머니의 누런 무명옷만 보다가 화려한 기모노의 색깔이 고와 보여서 였을까 . 오두개 먹고 입가가 까매졌을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본다 . 간호장교가 되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14 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터지고 18 살에 전쟁이 끝났다 .
친한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되고 싶은 사람 , 닮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 여자의용군 교육대 발족(출처 전쟁기념관) “ 친구 집에 참 멋있는 군인이 하나 와있네 . 친구한테 물어봤더니 이모 딸이랴 . 그때 군인들 통합병원이 광주에 있었어 .
전쟁 끝나고 바로니까 환자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 그 시절에 간호장교였던 가봐 . 광주가기 전에 이모 집에 잠깐 들른 거지 . 그때 그 언니가 입고 있던 군복을 보고 반한거야 . 누리끼리한 군복이었는데 그 놈을 쫙 데려서 모자까지 갖춰 입었는데 왜 이리 멋있게 보여 .
그 다음에 친구를 만나봐서 물어보라고 그랬어 . 어떻게 하면 그 언니처럼 간호장교가 되는지 .. 김제 어디 면사무소를 찾아가면 임시 시험 보는 곳이 있다고 가르쳐줘서 친구랑 나랑 거기를 찾아서 갔지 . 나도 옛날 사람이었지만 키도 클 만큼 크고 얼굴도 누구한테 안 빠지고 그랬어 .
체격도 쫙 빠지고 좋았지 ... 신체조건 , 학벌 이런 것을 본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랑 같이 손잡고 찾아간 거지 . 그때는 면접인지 뭔지도 몰랐지 . 신체조건은 다 합격했다고 그려 . 우리보고 . 그런데 그 사람 말이 고졸 이상어야 합격을 한데 . 근데 전쟁 통에 어찌 학교를 다녔겄어 .
말 잘하는 내 친구가 물어보더라고 . 어째서 고졸이상어야 하냐고 .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시대 보냈지 , 전쟁 보냈지 . 약 같은 것이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지 . 다 외국에서 수입을 하니까 영어로 된 약 이름을 알아야 한데 .. 누가 뭘 가져오라면 영어보고 가져오고 그래야지 ..
가하고 나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오면서 어느니 그러것다 . 우리나라에서 난리만 치고 약 만들 그런 것이 없었겠다이 . 갔으면 좋았을 텐데 . 우리가 해당이 안 된다니까 .
그 시절에 내가 장교가 되었더라면 인생이 뒤바뀌었겠지 .” 인터넷을 뒤적거려 그 시절 여자의용대 사진을 찾아내 할머니에게 보여드렸다 . 한참을 바라보시고 , 한참 혼잣말을 하신다 . 인생이 많이 뒤바뀌었을 텐데 . 나라가 엉망이었지 . 그 시절은 .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먼 길을 걸어갔을 18 살 소녀의 뒷모습 . 2 년 뒤 이모의 소개로 트럭타고 이서면 치릇골 ( 현재 갈동마을 ) 로 시집온 김양금 할머니 . 그의 첫 번째 살림이 시작된다 .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집을 돌보며 살림을 한다 . 할머니가 주신 시금치를 삶아 나물을 무쳐낸다 .
할머니의 황토 빛 밭에서 겨울바람 이겨낸 시금치 맛이 달큰하고 애틋하다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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