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을 하루 앞둔 날, 노동환 씨의 목공방에서 그를 만났다. 2025년 11월 법 개정으로 ‘근로자의 날’은 ‘노동절’이 되었지만, 무심코 튀어나온 익숙함에 그만 “내일 근로자의 날인데 쉬셔야죠?”라고 묻고 말았다. 아차 싶은 마음도 잠시, 그는 씨익 웃으며 “노동절이죠”라고 나지막이 정정해 준다.
사용자를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는 수동적인 ‘근로’에서, 사람이 주체가 되어 에너지를 쏟는 능동적인 ‘노동’으로 나의 무딘 인식이 바로 잡히는 순간이었다.
철도 노동자 노동환씨(1967년생)은 1985년부터 약 40년간 철도 현장을 지켜온 베테랑 기관사이자,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울기관차지부장을 지내며 은퇴하기 전까지 동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의 현장에 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작년 6월에 은퇴하고 꿈에도 그리던 바이크 전국일주를 떠날 계획이었지만 잠시 접어두고 그해 가을 고산미소시장에 리싸이클링목공공방을 열었다. 철도 기관사로 일하는 와중에도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 사내 목공동아리도 만들고 동료들의 휴식 공간에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뚝딱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다.
완주 화산면에 살고 있는 친척 동생의 권유로 2017년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에서 진행하는 난로제작교육을 이수하며 생애 첫 난로를 만들어 그해 겨울 ‘나는 난로다’ 전환기술박람회장에 난로를 출품했다.
그렇게 완주와 연이 닿았고 2020년 무렵 양주에서 화산면으로 덜컥 삶터를 옮기게 되면서 전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출퇴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2025년 6월. 반 평 공간의 기관차 운전실에서 40년간 쉬지 않고 달렸던 그는 이제 땅으로 내려왔다.
요즘도 종종 기차를 운전하는 꿈을 꾼다고 한다.
“기관사들 정년이 58세입니다. 더 하려면 60세까지 할 수도 있는데, 나 40년 일했어요. 징그러워요. 이제 그만 쉬고 싶었어요.”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앳된 기관사가 겪은 첫 파업 1985년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7월 철도청에 입사해 기관사가 되었다. 2005년 철도청이 폐지되고 공사 체제(현 코레일)로 전환되기 전까지 여유롭게 쉬거나 여행을 가본 기억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팍팍한 삶이었다.
“지금은 구파발이라고 하죠. 그곳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죠. 제가 살 때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동산리라는 곳이었어요. 완전 시골이었어요. 지금으로 치면 화산면 정도의 느낌이었어요. 아버지는 목수였고요. 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죠. 어린 시절 생각하면 항상 배고팠죠.
저도 9살 아이인데 3살 아래 동생도 제가 보살펴야 했으니 밥하고 빨래하고 살림을 했죠. 중학교 3학년 올라갈 때였는데 고민이 되더라고요. 동생이 중학교를 가면 나는 고등학교 포기해야겠다 생각했는데 학교 교실 뒤에 고등학교 소개하는 책자가 걸려있었는데 철도공고가 학비가 무료래요.
선생님에게 이 학교에 원서 넣고 싶다 했더니, 담임이 여긴 ‘네 실력으로 안돼’ 그러더라고요. 내가 우겼지. 나 여기 못 가면 공장가야된다고 하니까 부모님 모셔 오래요. 아버지 일하시느라 못 오신다고 제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화끈하게 원서를 써주시더라고요.
일 년 동안 미친 듯이 연합고사 준비를 했어요. 결국 철도고등학교 차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철도고에 다니면 무료로 기차를 탈 수 있었는데 저는 다른 친구들처럼 어디 한번 놀러가보지를 못했네요.”
1988년의 여름은 뜨거웠다. 입사 3년 차, 앳된 기관사였던 그에게 '파업'은 생소한 단어였지만,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운전실에 오르던 동료들의 눈을 보며 깨달았다. 파업의 이유는 간단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당시 철도 공무원이었던 기관사들은 한 달 평균 350~400시간에 달하는 노동환경에 처해 있었고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시간 외 근무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노동환씨도 선배 기관사들과 함께 그해 7월, 처음으로 운전대를 놓고 광장에 섰다.
당시 어용 노조에 반발하여 철도 기관사들이 주축이 된 이 파업을 통해 훗날 시간 외 수당, 야간 수당, 휴일 수당 등을 처음으로 받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노동조합이 뭔지도 몰랐는데 고참들이 이렇게는 못 살겠다, 힘들다 하면서 그것이 파업이 된 거죠. 20대 청년이 바라본 파업은... 형님들이랑 같이 모여있으니까 그냥 좋더라고요. 맨날 모여서 저녁에 술도 한 잔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었고 의식화되었던 중고참들이 주도하면서 노동조합을 민주화하는 과정 속에 함께 했죠. ”
그가 일했던 기관차 운전실은 반 평 남짓한 공간이다. 편안한 객실 의자 대신 딱딱한 시트 위에서 전방을 주시하며 하루를 보냈다. 인체공학적 배려가 없는 그곳에서 여름의 열기를 이겨낼 도구는 낡은 선풍기뿐이다. 극심한 소음과 진동 속에 노출된 기관사들에게 허리 질환과 난청은 피할 수 없는 직업적 질병이다.
“부산까지 가면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3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데 그 시간은 영락없이 자야 해요. 열차 운전하면 좋은 풍경 실컷 보면서 좋겠다, 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앞을 계속 주시해야 하니까. 그리고 기관사가 버튼을 일정하게 누르지 않으면 열차가 비상정차를 해요.
그러니 한 손으로 계속 잡고 있어야 해요. 예전에는 하도 졸리니까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예 사용할 수 없어요. 눈 오면 기차도 브레이크가 잘 안 들거든요.
역을 지나쳐서 설 때도 있는데 퇴행해서 다시 역으로 가면 되는데 지금은 기관사 개인의 징계로 과태료가 200~300만원이에요. 한 달에 두 번 걸리면 오백만원이 넘어요. 노동 현장의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않으면서 기관사만 족치고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으니 기가 막히죠.”
노동환씨는 은퇴를 한 해 남겨 두고 2024년 열차 운전실 내 감시카메라(CCTV) 설치에 강력히 반대하며 삭발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사고의 근본 원인인 인력 부족과 노후 설비는 외면한 채 안전사고 예방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감시와 통제의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40년 노동의 시간을 보내며 수차례 거듭했던 삭발 때문일까, 지금의 그의 짧은 머리가 자연스럽다. 정갈하게 정리된 그의 8평 남짓한 목공방은 노란색 벽면의 빛깔 때문인지 들어서면 유난히 따뜻하고 포근하다.
많은 것이 쉽게 버려지는 세상 속에서 낡은 것들을 고쳐 쓰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이곳을 찾아와도 좋다. 그는 현재 마을 어린이들의 공유 놀이터에 놓여 질 것들을 설계해 제작하고 있다. 또한 시골살이에 필요한 난로제작 교육을 위해 땅끝 해남이나 장흥으로 출장을 가기도 한다.
늘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달렸던 길은 끝났다. 새로 시작된 길에서 둘레둘레 해찰하며 천천히 자신의 속도대로 달리는 노동환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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