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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경의 삶의풍경 · 2026.04.06

동상면 신사봉마을 원덕례 할머니 이야기

"이 손이 내 훈장이야"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26.04.06 10:49 조회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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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곤드래, 멜라추, 토종밤, 냉이, 감삐지, 깐쬭파, 호박고지, 꼭감, 고사리, 건취나물..’ 사계절을 정성스럽게 들여다보고 거둬들였을 작물들의 이름이 할머니의 수첩에 적혀있었다. 키우는 정성 못지않게 한 획 한 획 꾹꾹 눌러쓴 이름들이다. “공부를 못해서 글씨를 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내가 농사짓는 것은 쓸 줄 알아.”

원덕례 할머니
원덕례 할머니

“할머니 감삐지는 뭐에요?” “안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데? 감 썰어서 말린 거. 감말랭이여. 우리는 감삐지라고 불러(웃음)”

동상면 연석산 아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신사봉마을. 원덕례 할머니(1937년)댁의 마당은 지금도 현역 농사꾼의 삶이 이어지는 일터다. 약재로 쓰이는 오갈피나무를 잘게 쪼개 볕 좋은 마당에 널어 말리고 겨우내 맛이 들어찬 무는 썰어서 무말랭이를 할 참이다.

원덕례 할머니는 2012년 완주로컬푸드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참여해 온 소농이다. 동상면에서 활동하는 ‘로컬푸드 할머니 삼총사’로 알려졌으며, 2017년에는 완주문화재단이 주관한 ‘예술농부’ 사업에 참여했다. 호미 하나로 밭을 일구며 살아온 그의 삶은 사진과 글, 영상으로 기록되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 할머니는 아흔이 되셨고 여전히 씨앗을 심고 키워서 거둬들이는 일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평생 농사짓던 땅이 묵어있는 것도 괴롭고 풀이 나서 매야 하는데 그것도 안 하면 괴롭고 눈으로 안 보면 모르겠는데 보이는데 안 하면 오히려 괴롭지. 몸이 힘들어도 해야지. 처음에 로컬푸드 생길 때 직원들이 마을에 와서 허물없이 지냈어. 지금도 생각나고 보고 싶네.

같이 시간 보내면서 작물 포장하는 법, 어떤 작물이 잘 팔리는지도 다 알려주고 그랬지. 그때가 참 좋았어. 시금치, 상추 이런 것도 잘 팔리고. 그때는 조합원이 많지 않았으니 작물 내놨다 하면 다 팔렸지.

시골 공기 좋은 곳에서 자란 작물들이니 도시 사람들이 좋다고 사가고 통장에 돈 들어오면 참 좋았지. 지금까지도 하고 있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좀 젊었으면 좋겠어. 지금은 농사 노하우도 생기고 기반도 다 잡혔지.

처음에는 푸성거리 조금씩 했는데 지금은 아로니아도 심고 고사리도 심고 밤나무도 심고 팔 것 천지인데 그 사이, 내 몸이 늙어버렸네. 젊었을 때 이런 기반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나는 지금도 내가 번 돈으로 살아. 나는 양로당 회장이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회의를 하러 종종 밖으러 나가지.

로컬푸드 회의, 양로당 회장들 회의도 가고. 이렇게 늙었어도 인사치레할 곳도 많아. 손주들 오면 용돈도 주고. 내가 버는 거야. 그게 좋아. 내 힘으로 사는 것. 일은 대간하게 했어도 후회는 없어.”

할머니는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밭일과 마을 일 사이에서 그의 하루는 지금도 분주하게 흐른다. 두어 평 남짓한 방은 휴식 공간이자 작업실이다. 밭에서 거둬들인 작물을 비닐에 소포장하는 작업을 마치면, 일주일에 두 번 마을로 찾아오는 로컬푸드 기사에게 납품한다.

신사봉마을의 첫번째 신식주방
신사봉마을의 첫번째 신식주방

작물 출하 송장에 적힌 할머니의 글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노란 니어카를 끌고 종종걸음으로 밭과 밭 사이를 오갔을 발걸음과 땅을 두드리는 호미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방 한쪽 벽에는 할머니가 낳아 키운 일곱 남매의 어린 시절 사진이 걸려 있다. 아이들이 자라 각자의 가정을 이루고, 또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자라 다시 아기를 낳기까지의 시간도 사진 속에 함께 담겨 있다. 할머니는 농사일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가만히 앉아 벽에 걸린 사진들을 바라본다.

한 번 천천히 훑어보고 나면 외롭던 마음도 이내 가신다고 한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면 손주들은 할머니 집 벽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듯 저마다의 가족사진을 걸어둔다.

자신이 배우지 못했던 것이 늘 마음에 남아, 자식들만큼은 꼭 공부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밤티재를 넘어 전주로 유학을 보내 키웠고, 아이들은 모두 제 몫을 하며 잘 자라주었다. 대학원까지 마친 막내아들 덕에, 학교는 다니지 못했어도 박사모를 한 번 써 보았다고 할머니는 뿌듯하게 말한다.

이제 큰딸도 벌써 일흔이 되었다. 사진 속 올망졸망한 일곱 남매 옆에 서 있는 마흔 살 무렵의 원덕례 할머니에게 자꾸 눈이 간다. 밤낮없이 농사일을 하느라 마르고 지친 모습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 때가 좋았는데, 저 당시는 먹고 사느라 좋은 줄도 모르고 살았지. 19살에 소양서 시집와서 이 터에서 여지껏 살고 있네. 그사이 집은 몇 번 갈아서 지었지만 터는 그대로야. 세월이 지나면서 낡으니까 나무 뜯어내고 우리 아저씨가 브로크로 다시 지었지.

그 뒤에 웃풍이 쎄니까 우리 아들이 겉에 조립식으로 싹 덧댄거지. 세 번에 걸쳐서 집이 고쳐진 거야. 처음 집 고칠 때 우리 아저씨가 부엌을 신식으로 지어줬어.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부엌에 싱크대 놓은 집이 우리 집이야. 이 집에서 시어머니가 아기 받아줘서 7남매 낳고 키웠어.

일본살던 아주버님이 고향방문해서 찍어준 사진. 왼쪽 남편(故최재욱) 옆의 한덕례
일본살던 아주버님이 고향방문해서 찍어준 사진. 왼쪽 남편(故최재욱) 옆의 한덕례

그때는 이 근방에 사람이 겁나게 많았어. 지금은 허술하지만 나 시집왔을 때는 학교에 애들이 욱신욱신 많았어. 그러니 길가에 술집이 세 군데나 있고 동네 남자들이 술 먹느라 집을 안 들어와. 그러면 집집마다 애들 시켜서 아버지 모시고 오라고 난리였지.

그렇게 먹고 와서는 집으로 들어오면 애들 시켜서 주전자에 술 받아오라고 해서 또 마시고 그랬지. 그래도 우리 신랑이 일을 잘해서 장작 떨어질 일 없이 쟁여놓았지. 억척스럽게 일을 잘했어. 쌀농사, 담배농사짓고 가을에는 곶감으로 돈 벌고.

좋은 세상 더 살다 가지 막둥이 대학원 입학하는 거 보고 환갑지나 64살에 돌아가셨지.”

할머니는 자신이 자가용이 4대나 있다고 자랑하신다. 무릎 아픈 어머니 생각해 아들이 사다 준 세발자전거, 딸이 사다 준 전동차, 농협에서 제공한 보행기, 그리고 노란색 니어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밤나무밭에 갈 때는 전동차를 타고 가지만 아무래도 자주 끌고 다니는 자가용은 니어카다. 니어카를 보행기 삼아 의지해 끌고 다니며 행하는 곳은 늘 밭이다.

“이렇게 로컬푸드 하면서 사진도 찍히고 표창장도 받고 그러니까 좋은가 어찐가 하다가도 그냥 내가 잘 살은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어. 고생은 했어도 그래도 올바르게 살았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지. 나는 내가 일하는 것이 좋아.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한다는 마음으로 평생 일한 거야.

후회는 없어. 우리 딸이 내 손을 보더니, 농담한다고 엄마 추접스러워서 어디 손을 못 내놓겠네, 그 소리를 하길래 야! 야! 이 손이 내 훈장이다 큰 소리쳤지. 이게 내 훈장이다 뭣이 추접시러!”

현장 사진

동상면 신사봉마을 원덕례 할머니 이야기 사진 1 동상면 신사봉마을 원덕례 할머니 이야기 사진 2 동상면 신사봉마을 원덕례 할머니 이야기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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