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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경의 삶의풍경 · 2023.03.24

묵계마을 이상길, 전귀순 부부 이야기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23.03.24 10:12 조회 96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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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말은 할 줄 몰라도, 70 년을 함께 살았네 묵계마을 이상길 , 전귀순 부부 이야기 지난 몇 달 동안 동상면에 갈 일이 많아졌다 . 수만리 단지마을의 이진영씨를 인터뷰하고 그의 소개로 사봉리 묵계마을의 조인식 이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

조인식 이장은 같은 마을에 살고 계시는 노부부를 꼭 만나보라고 귀뜸해 주셨다 . 그렇게 귀한 인연으로 이 마을에서 70 년을 함께 살고 계신 91 세의 이상길 할아버지와 90 세의 전귀순 할머니 부부를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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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셨고 할머니는 열아홉에 인근 신월리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오셨다 . 70 년을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 문 앞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용하는 지팡이가 나란히 기대어 서 있었다 . 열아홉과 스물에 만나 구순이 넘어가는 지금까지의 모든 세월을 상징하는 장면 같았다 .

노부부가 사는 거실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갓을 쓰고 계신 이상길 어르신의 부친 사진부터 6 남매의 결혼식 사진 , 손주들 사진 , 결혼 60 주년 기념사진 , 작년에 결혼 70 주년을 기념하며 찍은 가족사진이 이들의 삶을 곱게 편집하듯 벽면 가득히 전시되어 있었다 .

“ 묵계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 1933 년 6 월 30 일 태어났지 . 지금 이 집터가 내가 태어난 곳이야 . 어머니는 내가 12 살 때 해방되던 해 해방도 못 보시고 돌아가셨지 . 내 위로 네 살 위 형 , 아래로 남동생 둘 사형제와 아버지만 살아남았지 .

여동생들은 어렸을 때 병으로 다 죽고 . 해방되기 전에 일제 때는 참 고생 많았지 . 나는 그때 어린아이였지만 일본부대 공출하는 거 때문에 해만 뜨면 산으로 갔어 . 송탄유 ( 松炭油 ) 라고 소나무 송진 나오는 거 있지 . 소나무들을 모아서 그걸 기름을 짜서 일본군 비행기 연료로 썼어 .

또 칡넝쿨도 캐서 모아야 해 . 그건 일본군 말 먹이로 썼어 . 마을마다 정해진 물량이 있어서 그걸 채워야 해 . 서른 살 이상 어른이면 100 관 이상 캐야 하고 5 살 먹은 어린아이들은 10 관 20 관 그렇게 캤어 . 해방되면 다 좋을 줄 알았더니 6.25 전쟁이 터졌어 .

이 부락에만 빨치산들이 3 천 명은 넘었던 거 같아 .” 처음에는 두 분의 오래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할아버지는 자꾸만 다른 이야기들로 분위기를 바꿔 놓으셨다 .

6.25 전쟁과 치안방위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못마땅해 하며 그만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을 대표 사진으로 쓰고 싶었지만 ,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두 분은 나란히 앉지 않으셨다 .

주변에서는 결혼 71 주년을 기념해야 한다고 부산스럽지만 정작 이들 노부부는 뜨뜻미지근했다 . 그러는 사이 할아버지는 오래된 레퍼토리를 계속 이어나가셨다 . “ 그때 빨치산들 피해서 동네 청년들이 진안 부귀로 넘어갔어 . 진안 부귀는 인민군이 있기는 했어도 경찰대가 있었어 .

형님 따라 거기로 가서 의경 전투대 소속이 돼서 일을 시작한 거지 . 그때 내 나이 17 살이었어 . 자네도 그 시절에 태어났으면 총 들고 싸웠을 거야 . 그러다가 전주 북중학교 앞쪽에 여관이 있었는데 동상면 사람들이 모여서 고향지키기 위해 방위대를 조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직을 만든 거지 .

그러다가 형님은 다시 차출되서 동상면으로 돌아와 작전을 한 거야 . 모래봉 작전 . 3 월 무렵에 전사하셨지 . 지금은 임실 군경묘지에 묻혀 계셔 . 큰 자식마저 그렇게 가니까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허망하고 무서워 . 남은 아들 셋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주로 피난을 간 거지 .

전주 기린봉 자락 밑에 가재미 마을이라고 있었어 . 거기서 방 얻어서 살았어 . 전주로 나가긴 했는데 17 살 먹은 놈이 뭐 할 수 있는 게 있겠어 . 밥이라도 안 굶으려고 치안경찰대를 들어갔어 . 전주시 방위대야 . 전주 남문을 총 메고 지켰지 . 내 동료들도 많이 죽었어 .

나는 명이 참 길었나 봐 . 그 난리 속에서도 살아난 걸 보니까 .”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기억은 구체적이고 명료했다 .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울 뿐이지 그 이야기가 허황되다고 생각하진 않으셨다 .

할아버지 인생에서 방위대 활동을 했던 기억은 인생의 가장 큰 흔적으로 남아있다 .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목숨 줄이 긴 건도 아마 먼저 세상 떠난 형제들 대신 사느라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 시절이 그저 흘러간 과거이고 역사일 뿐이겠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너무 얇았던 그 시절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고 어쩌면 삶의 가장 중요하고 강렬한 한 부분일 것이다 .

그렇게 할아버지는 짧은 전주살이를 접고 열아홉에 다시 동상면 고향 마을로 돌아오셨다 . “ 결혼은 스무 살 먹어서 했어 . 서로 누군지도 모르고 결혼식 날 처음 봤지 . 안사람은 신월리에서 시집왔어 . 하인이 많았어 . 그 하인이 뭔고 하니 나랑 같이 동상면 치안대로 일했던 대원들이야 .

그 대원들이 나무로 가마를 만들어서 거기에 안사람을 태워왔지 .( 옆에서 듣고 계시던 할머니는 가마가 아니고 들것이었다고 기억했다 ) 막 결혼해서는 움막 같은 곳에서 살았어 . 전쟁통에 집이 다 불타고 없어서 . 그러고 살면서 이 터에 집을 짓고 그 뒤에 1991 년에 다시 지어서 지금껏 살고 있어 .

시집와서 우리 안사람이 고생 지긋지긋하게 했어 . 뭔지 알지도 못하고 시집을 왔지 . 왔더니 시동생 둘에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 모시고 , 새신랑은 빨치산 잡으러 다닌다고 한 3 년은 산으로 돌아다녔으니 말 다했지 .” 몸이 불편하신 할아버지 대신 집안의 온갖 일은 할머니 차지가 되었다 .

밭일은 아들 내외가 와서 거들고 할머니는 구경만 하신다고 하지만 마당에는 그때 그때 반찬해먹을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 화단 한 쪽에는 지독히도 예쁘다는 수선화가 연두 잎을 내밀고 있다 . 마당 한가운데 평상이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다 . 그곳에 할머니와 함께 앉아 산을 바라봤다 .

할아버지의 청춘이 넘나다녔을 산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 . 할머니의 청춘도 이곳에 앉아 기다렸을 것이다 . 낯선 시집살이 와중에도 틈틈이 산을 올려다보며 기다렸겠지 . - 할아버지 : 아내한테 한마디 하라고 ? - 할머니 : ( 괜히 돌아앉으며 ) 하이고 , 할 말은 무슨 ..

- 할아버지 : ( 겸연쩍은 듯 할머니를 보고는 ) 참말로 우리 집에 와서 고생만 했지 . 그것 뿐이지 . 내가 아내한테 다정한 사람은 못되지만은 , 아내가 고생한 걸 알기는 알아 . 그 마음 만은 알아 . 지나고 보면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 사랑이었으니까 살았지 .

사랑 아니면 나가버리지 뭐더러 같이 살아 . - 할머니 : 몰라 우리는 사랑도 몰라 . 사랑이 좋은 것인가 , 뭐싱가도 모르고 살았어 . 시방도 살아 . 사는 것이니까 사는 거야 . 인터뷰를 마치고 주차된 차까지 걸어가는 내내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배웅을 해주셨다 .

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오는 동안 좋아하는 노래의 한 구절이 계속 맴돌았다 . “ 긴 세월에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을 찾는 거야 ” / 글·사진= 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현장 사진

묵계마을 이상길, 전귀순 부부 이야기 사진 1

첨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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