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서방산을 지키려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 용진면 신촌마을 정도순씨와 동네 할머니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 ,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각 , 감정 , 말을 들으며 느낀 것은 이 세상에 평범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
어디에도 기록된 적이 없는 사람들의 흔적과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하게 되어 새삼스럽게 자부심을 느낀다 . 추워질 기미가 없는 어느 겨울날 , 미루고 미루던 용진면 운곡리 마을조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 운곡리의 신촌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러 가지를 묻고 이야기를 들었다 .
예전에는 신기촌이라 불리던 곳 . 녹두밭 웃머리 자갈 많은 험한 땅을 일궈내며 참 가난한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들이다 . 정도순씨는 할머니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회관에 누워 계신 할머니들을 불러세우고야 만다. 그러다가 2004 년 마을에 닥친 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개발업자의 석산개발로 환경피해와 산림훼손 , 주민생존권을 위협하는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 이곳저곳에 걸려있던 석산개발 반대 현수막을 본 기억이 번득 스쳐지나간다 . 16 년이 지난 일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당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촌마을과 두억마을 , 용진면 주민들 , 지역 내 종교 및 사회단체들로 구성된 ‘ 서방산 봉서골 석산개발 반대 대책 위원회 ’ 가 만들어졌고 2 년 6 개월 동안 천막농성이 이어졌다 .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그 당시 치열했던 집회 현장과 협약체결 마무리 과정에 대한 많은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다 . 집회 현장에 앉아 소리치고 있는 이름 모르는 할머니들의 표정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
정도순씨 (65 세 ) 는 그 당시 신촌마을 부녀회장이었다 . 마을을 지켜야 된다는 일념으로 앞장섰고 석산개발 진입로에 천막을 짓고 마을 주민들이 조를 나눠서 밥해먹고 그곳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 “ 내가 법원 재판장도 엄청 불려 다녔어요 .
개발업자 측에서 사진 찍어서 불법 시위한다고 신고하고 내야할 벌금도 엄청 났는데 봉서사 스님들하고 서철승 신부님이 마을에서 바자회를 열어서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벌금도 내고 재판도 하고 그랬지 . 그런 난리가 없었어 .
집회한다고 쫓아다니고 기자회견한다고 쫓아다니고 , 그때 환경운동연합 이정현씨가 참 애를 많이 썼어 . 자다가도 사이렌 울리면 동네사람들이 다 쫒아 나가서 포크레인 바가지에 동네 할머니들이 들어가 앉아 있고 길바닥에 눕고 그랬어 . 2 년 6 개월을 그 짓을 했어 . 우리같이 못할 걸 .
우리는 목숨 걸고 했어 .” 2년6개월동안의 기록. 천막농성 당시 마을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생활했던 것을 기록한 지출장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 우리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시골사람들 ’ 이라 말한다 .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고 , 그것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
목숨 걸고 지켜낸 우리 마을 신촌마을 할머니들은 ‘ 용진면에서 정도순 모르면 간첩 .’ 라며 그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번개처럼 날라 다니던 정도순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 정도순씨는 21 살 때 익산 춘포에서 이곳으로 시집왔으니 44 년을 신촌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다 .
똑소리 나던 새색시가 4 남매를 낳고 남편과 복숭아 과수원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사나움 한 번 피지 않던 사람이었다 . 어디 정도순씨 뿐이었겠는가 . 그저 억척스럽게 험한 땅 일구며 살아가는 순하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싸낙배기가 되었다 . 요즘도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든 달려간다는 정도순씨.
“ 내가 나이는 어려도 대장이야 . 할머니들이 내 말을 잘 들어주니까 .( 웃음 ) 내가 원래 사나운 사람은 아니야 . 그런데 석산 반대하면서 싸낙배기가 되어버렸지 . 개발업자들이 경찰 데리고 와서 포크레인으로 파내버린다고 위협하니까 순하던 사람도 욕만 남더만 . 욕도 말도 못하게 했어 !
생전 욕도 안 해 본 사람들이 . 지금은 다시 순한 양이 되었지 .” 정도순씨의 말에 할머니들은 ‘ 그려 , 그려 . 잘한다 !’ 맞장구를 쳐주신다 . 동네 할머니들이 나를 안아줬어 .
그래서 일어선 거야 서방산 석산개발 반대 집회가 시작되었던 2004 년은 정도순씨 자신의 삶에서 고난이 많았던 해였다 . 한참 모내기 하던 때 손가락을 다쳐 절단 수술을 받았고 하루에 진통제를 20~30 개씩 삼켜가면서 일을 했지만 다른 손가락에도 염증이 생기면서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
“ 모내기 다 끝내고 8 월에 대학병원을 간 거지 . 바로 입원시키더라고 . 전신성경화증이래 . 합병증으로 루푸스 , 루마티스 관절염까지 왔다고 . 그때 병원에서 오래 못산다고 했어 . 고생만 엄청 하다가 ..
몇 달 뒤에는 아기 아빠가 조경일 한다고 보라매 공원에 큰 소나무를 복구하러 갔는데 오후 4 시쯤 전화가 온 거야 . 서울 병원으로 갔더니 나를 시체안치실로 데리고 들어가더라고 . 동네가 발칵 뒤집혔어 . 내가 정신도 많이 잃고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나를 많이 안았어 .” 나는 계속 물었다 .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냐고 . 자신의 병과 남편의 죽음을 잠시 묻고 ,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냐고 . 밀고 들어오는 포크레인 앞에 서고 , 소위 배웠다고 하는 높으신 양반들을 찾아가 앞장서서 소리를 지르고 ,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냐고 계속 물었다 .
“ 슬픈 일이 있었기 때문에 , 그것 때문에 더 한 거야 . 이겨내고 싶어서 . 마음을 집중하니까 슬픈 생각을 잊어버렸지 . 아기아빠 죽었다는 것도 못 느꼈어 . 동네를 지켜야 하니까 그런 슬픔이나 아픔을 느낄 새가 없었지 . 그래서 할머니들이 고마워 .
나를 안아줬으니까 내가 혼자되었어도 이렇게 살잖아 .” 정도순씨는 석산반대집회가 없었더라면 오히려 더 힘들었을 거라고 말한다 . 2 년 6 개월 , 온 힘을 다 쏟아 붙는 동안 곁에서 함께 한 마을주민들 덕에 아픔과 슬픔이 치유되었다 .
뒷 마당에서 서방산을 바라보는 정도순씨 이제는 갈아먹던 땅도 세내 주고 사남매 키워 다들 잘 살고 있으니 아쉬울 것 없다고 한다 .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병도 아니니 마음을 비우고 한 달에 한번 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받는다 . 대부분의 시간은 마을회관에서 이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
정도순씨는 요즘도 어딘가에서 산을 파헤친다는 소식이 들리면 오토바이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 기어코 그 산을 보고 온다고 한다 . 먹고 사느라 배운 것이 없다고 스스로 말한다 . 하지만 이제는 할 말이 있으면 하고야 만다 . 마을 사람들이 함께 겪은 큰 사건 덕에 자신의 의식 속에 새로운 눈이 생겼다 .
이제 그들에게 산은 새롭게 보이는 산이다 .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 마음속에 단단한 것을 품고 서로 의지해 살아간다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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