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이 살아가는 것 - 운주 엄목마을 김영중 어르신 이야기 엄목마을 앞에 흐르는 천을 바라본다 . 언제부터 이 물길이 흘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변함없이 살아가는 그 천을 바라본다 . 물길도 그대로 , 천등산의 능선도 그대로건만 다부졌던 청년은 여든 노인이 되었다 .
늘 변함없을 것만 같던 물길은 여름만 되면 폭우를 만나 거칠어졌다 . 김영중 (1946 년생 ) 어르신은 여름 장마철 큰물로 발길이 막혔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 기필코 마을 앞에 큰 다리를 놓아야겠다고 결심하던 순간이었다 . 군 제대 후 엄목마을의 이장이 된 그는 1978 년에 그 결심을 이루었다 .
그 당시 지역 신문에 그가 기고한 글을 옮긴다 . 『 1968 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그해 큰비가 내렸고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장선천에 큰 물이 흘렀다 . 그런데도 주민들은 이 내를 , 옷을 벗고 위험을 무릅써가며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 . 장선천에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언제나 위험스럽게 생각해 왔지만 그 해 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 장선천을 건너 모내기를 하고 오던 마을 주민 30 여명이 한꺼번에 물에 떠내려간 것이다 . 천명이라 할까 . 다행히도 한 사람의 익사자도 없이 헤엄쳐 나오긴 했으나 언제 사고가 또 있을는지 모르는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
특히 어린 학생들이 장선천을 건너 3 킬로나 떨어져 있는 학교에 통학하는 것을 볼 때 이곳에 기필코 다리를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 』 한문이 제일인 줄 알고 살아왔지 김영중 어르신의 아버지 ( 故 김개동 ) 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어깨 너머 천자문을 깨우쳤다 .
오로지 한문을 배워야 사람 구실을 하고 대우받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 이였다 . 엄한 아버지 말을 잘 따르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엄목서당에서 10 년 동안 한문을 배웠다 .
명심보감 , 통감 , 소학 , 대학 , 논어 , 맹자를 배우는 동안 15 명의 동급생들은 다 떠나고 혼자만 남아 공부를 하며 십대 시절을 보냈다 . 스승님이 아끼는 유일한 제자였다 . “ 스승님이 어느 날은 나보고 중용을 배우라고 그러셔 . 중용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중심 잡는 거야 .
그런데 책을 살 돈이 없었지 . 그래서 동네에서 숯장사하는 분을 따라다녔지 . 우리 동네에서 30 리 길을 가서 숯을 굽는데 , 그 당시는 숯장사가 불법이었어 . 경찰한테 뺏기니까 밤에 지게에 짊어지고 오는 거야 . 눈을 피해 길도 없는 곳을 헤쳐가면서 오는 거지 .
지게에 숯 10 관을 짊어지고 오는데 계속 걷다 보니 나중에는 발도 안 떨어지고 , 겨울인데도 땀이 나서 등허리에 소금이 허옇게 맺혀 . 그렇게 숯을 팔아서 중용이라는 책을 샀지 . 귀한 책이었지 .
그렇게 여러 공부를 깨우친 거지 .” 중용을 배우며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를 배운 그는 한문 덕에 이날까지 대우받으며 살아온 것 같다고 한다 . 한자를 모르는 이웃들을 대신해 여러 문서들을 처리해주기도 하고 어린 시절 스승님에게 배운 풍수지리로 마을 지관 역할을 하고 있다 .
젊은 이장의 푸른 꿈 김영중 어르신은 미 육군 제 7 보병사단에 입대해 DMZ 수색대로 복무하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지만 , 밥때마다 나오는 고기와 쌉싸름한 맥주의 맛은 지금 생각해도 극락같은 맛이라고 그때를 떠올린다 .
선임하사로부터 ‘ 카츄사 킴은 넘버원 카츄사 !’ 라는 찬사를 듣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한 살 어린 신부와 식을 올리고 농군의 삶을 살았다 . 논농사만 짓던 그 시절에 다소 생소한 작물이었던 딸기와 취나물 농사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던 때였다 .
“ 제대하고 막 나왔을 때 논에서 일하고 있는데 면직원이 찾아와서 이장하라고 그랴 . 면장실로 나를 끌고 가다시피해서 면장 앞에서 차렷경례를 시키네 . 그렇게 이장일을 본 거지 . 나 이장할 때 최고 큰 사업이 뭐였냐면 마을 앞 냇가에 다리 놓은 거였어 .
그 당시 관급자재로 시멘트하고 철근은 관에서 사줬지 . 그해 6 월 30 일이 준공일이었는데 그 전 12 월 23 일부터 동네 사람들이 앞에 냇가에서 모래를 채취하기 시작했지 . 사람들이 부역을 나와서 조를 짜서 일을 한 거지 . 동네 사람들이 스스로 놓은 다리라고 봐야지 .
다리 개통되었을 때 그때 기분이 진짜 좋았어 . 다리 위에서 고사도 지내고 풍악을 울리고 시끌벅쩍했지 . 다리 개통식을 하고 한 3 일 후에 비가 부실부실 오기 시작하더니 마치 다리를 시험하는 것 마냥 , 다리 바로 밑에까지 냇가 물이 차서 흘러가네 .
옛날 같으면 다 쓸려 내려가니까 얼씬거리지도 못했을 텐데 끄떡없는 다리 위에서 그 물을 보니까 참 대단하데 .” 변함없이 늘 주변을 돌보는 사람 학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늘 일상에서 자신을 정비한다는 말이 있다 .
김영중 어르신은 명심보감 , 통감 , 소학 , 대학 , 논어 , 맹자와 같은 고전들을 평생 몸에 익히며 살아왔다 . 한 번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 그 내용들을 깊이 새기고자 반복해서 읽고 쓴다 .
매주 금요일이면 고산향교에서 한문을 공부하는 노년의 유림이자 하루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정성스러운 기록가이다 . 그의 작고 낮은 탁자에는 종이를 편철하여 직접 만든 낡은 책들이 쌓여 있다 . 17 살 무렵 먹을 갈아 붓으로 한자 한자 써내려간 주역은 지금도 생각나면 펼쳐보는 책이다 .
낡은 서류봉튜를 재활용해 편철한 노트 표지에는 ‘ 행유록 行流錄 ’ 이라 써있다 . “ 사십대부터 쓰기 시작했지 . 그저 하루의 지난날을 기록한 거야 . 나는 어두운 세상을 사는 거야 . 누가 요즘 이런 것을 쓰겄어요 ? 그냥 낙으로 . 둔해지고 정신이 흐려지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쓰는 거야 .
저녁 7 시나 8 시쯤 이 자리에 앉아서 먹을 갈고 붓으로 써내려가 .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군자지도 ( 君子之道 ) 라 하여 변함없이 살아가는 것 . 그리고 마음을 자꾸 씻어내려 . 그래야 몸을 지키는 거야 .
고약한 마음 , 나쁜 마음을 얼른 씻어내고 몸을 바르게 , 행동을 바르게 , 양심을 바르게 . 그거지 뭐 , 다른 것 있가니 .” 김영중 어르신 댁에서 이야기를 나눈 뒤 그 냇가로 다시 걸어갔다 . 몇 해 전 새로 만들어졌다는 엄목마을 다리 앞에 서 본다 .
노후화된 옛날 다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 그 옛날 다리 위에서 풍악을 울리며 고사를 지내던 사진은 생생하다 . 다리 개통식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마을의 제일 연장자이신 95 세 어르신이 다리 입구에서 끝까지 무사히 걸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
젊은이들의 왁자지껄 웃음소리 , 꽹과리 소리 , 아낙들의 덩실덩실 춤사위 너머 천등산의 능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 / 글·사진=장미경 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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