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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의 완주이야기②] ‘남봉리(南峰里)’ 사람들과 정자(亭子) 2014-09-03

[이승철의 완주이야기②] ‘남봉리(南峰里)’ 사람들과 정자(亭子)

 

지금 부산 해운대에서 내츄럴치과를 개업한 박운용은 남봉에서 태어난 젊은 의사로 향토사에 밝아 세심정과 쌍청헌 만죽정 이야기를 줄줄이 외우며 지도 위에 절묘하게 그려 넣어 지방민의 눈길을 끈다. 호남 명필 이순재(李舜載:광주이씨)씨도 남봉 출신이며, 4·19 민주화 직후 유정식(기계유씨)은 민선 면장을 했다.

 

일제시대 노초동 구홍조(具弘祖) 한학자는 호적신고를 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던 꼿꼿한 선비였다. 선생은 만년에 ‘사람 눈에 들 게 없다[無足掛人目者]’며 책과 서상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우리밀축산 구금회 대표이사 증조부 이야기이다.

 

돈늪[돈놉]마을 연안차씨는 워낙 겸손하여 사당에 모시는 인물을 알리지 않아 아는 사람이 적어 이점이 좀 아쉽다. 전라도사 이신행(李愼行)이 근동에 정착했으며 비봉면 봉산 성주이씨는 후손으로 이을순 비봉면장을 했고, 이상목은 일 맡겨주면 큰 일할 청년이다.

 

남봉은 1970년대까지 집집마다 싸리를 재료로 용수와 채반 광주리를 만들어 전국에 공급, 이름을 날렸으며 자녀 교육에 힘을 써 후진들이 이재에 밝아 자수성가한 실속 있는 부자가 많다. 근래 새 길이 뚫리며 고산 진입 첫 번째 동네가 되면서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격이 다른 에너지자립마을이 됐다.

 

수태극(水太極) 산태극(山太極) 고산천 세찬 물줄기가 부딪치는 기암절벽 아래에 구극창(1637~1688)이 망북대(望北臺)를 세웠고, 현판 글씨는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 썼다. 극창은 송준길 제자로 아버지 치요(1609~1677)는 선교랑(종6품)을, 아들 익형(1663~1727)은 문과에 합격, 춘추관 수찬과 평안·황해 양도 아사(亞使)를 했으니 아버지 유산과 아들 덕으로 살림살이가 넉넉하여 풍류를 즐기기에 족하였다. 벼슬은 피했지만 정치엔 관심이 커 ‘북쪽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망북대를 지어 청나라 동태와 조정 상황 및 내 건너 관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비판과 때로는 여론을 조성했던 명소였으나 오랜 세월 우로풍상에는 어쩔 수 없어 결국 1970년대 사라지고 빈터엔 잡초만이 무성할 뿐이다.

 

마침 구명산 꼭대기에 새 정자가 섰다. 임정엽 전 완주군수는 방손 구금회와 중간자의 말을 듣고 간판 붙이기를 허락했으나 수혜자 측의 지나친 망설임이 너무나 길어져 성사 없이 시간만 흐른다. 이를 두고 ‘주는 떡도 받아먹지 못하는 격’이라는 뒷말을 듣고 있다.

 

옛날 고산현은 동, 서, 남, 북, 운동, 운서, 운북, 현내 8개면이 있었고 현재 ‘남봉리’는 그 당시 ‘남면(南面)’에 들었다. 286호에 남자 745구(口), 여자 867구를 지금 실태와 비교하며 걱정과 근심 없는 남봉을 만들어 출향민이 즐겨 찾아 닫힌 문 열어젖히고 나팔소리 맞춰 춤추는 마을을 만들어 보자.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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