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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쁜 노을이 있는 것도 모르고 살았지2014-06-28

이렇게 예쁜 노을이 있는 것도 모르고 살았지

평생 넘일 하느라 어느새 칠십 …

이렇게 예쁜 노을이 있는 것도 모르고 살았지
 

대아저수지의 ‘노을 할머니’
 
 
해 지는 게 참 신기해.
그 모습이 매번 달라.
색깔도 다르고.
해가 그냥 지는 게 아니야.
색깔이 연하다가
마지막으로 넘어갈 때는 빨개져.
빨간 홍시감 처럼 넘어가….
그게 참 신기하데.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면
기분이 이상해.
해는 저렇게 지면
다음날 또 떠서 뜨고 지고 할 텐데
사람은 한 번 지면
다시는 못 뜨잖아.
해는 지면 다음 날 또 뜨는데
사람은 한 번 지면
다시 못 오는 거야.
 
 
노을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가을이었다. 작년에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고 자동차를 장만하게 되었다. 자동차가 생기니 생활의 많은 것이 달라졌다. 생활의 흐름도 빨라지고 그만큼 일도 많아 졌다. 그 와중에 가을의 낭만을 온 몸으로 느끼고자 자동차 산책을 나섰고 주옥같은 완주의 풍경을 감상했다.
 
송광사, 위봉 산성, 동상을 지나 완주의 만추를 감상하며 드라이브를 하다가 대아저수지로 지는 해를 보며 잠시 멈추었다. 노을빛이 하늘과 저수지를 물들이며 붉게 번지는 풍경도 장관이었지만 도로변에 있던 매운탕집 창가에 앉아 이 풍경을 묵묵히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간간히 자동차가 지나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할머니와 나는 가을날 짙은 노을을 함께 봤다. 할머니는 끝끝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셨다. 그냥 이렇게 지나가다 만났는데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냐며. 그래서 할머니를 노을 할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입춘이 지나서야 할머니를 다시 찾아 갔다.
 
평생을 넘의 일만 하다가 어느새 칠십이 지났네.
 
고산면과 동상면의 경계를 잊는 대아저수지 도로변에는 민물매운탕집 몇 곳이 있다. 잡어와 무청 시래기를 넣고 푹 끓이는 매운탕을 먹기 위해 먼 길 마다 않는 맛객 부터 운암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점심장사가 끝난 뒤 비교적 한가한 시간에 노을 할머니를 찾아갔다. 주차장에 차가 들어서자 손님인줄 알고 문 앞에 나와 계시는 노을 할머니와 재회했다. 감기에 걸리셨는지 목이 잔득 잠긴 목소리였다.
 
“며칠 전에 갑자기 추웠잖아. 목이 칼칼하더니 감기가 오더만. 나는 감기 걸린 지도 몰랐어. 아침저녁으로 타고 다니는 버스기사가 내 목소리가 평소랑 다르다고 하네. 목이 잠긴 것 같으니 병원가보라고 해서 알았지.”
 
고산터미널에서 출발해 동상으로 행하는 300번 버스는 노을할머니의 출퇴근 버스다. 버스시간을 줄줄 외우고 계신다. 5~6년 전부터 매운탕 집 주방 일을 시작하신 할머니는 아침 첫차를 타고 출근하여 저녁 8시 막차를 타고 퇴근하신다.
 
“옛날에는 넘의 일 다니면서 돈 천원, 이 천원 받으면서 일했지. 주로 논일 밭일을 많이 했지.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해도 나 같은 사람은 없을 거야. 말도 못혀. 이날 이때 까지 넘의 일만 하다가 나이만 이렇게 먹었네. 맨날 넘의 일만 해서 일이라고 하면 이제 징그럽지. 여그서는 5~6년 전부터 일을 했지. 그래도 농사짓는 일보다는 안 힘들고 훨 낮더만.”
 

 

생활력 강한 놈이 최고여 이 말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아.
 
할머니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다보면 가끔 입장이 바뀌어 인터뷰를 당하게 되는데, 그럴 때 늘 받게 되는 질문 3종 세트가 있다. ‘몇 살이냐’ ‘시집은 갔냐’ ‘왜 안 갔냐’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대부분 너스레를 떨며 넘기곤 하는데 노을 할머니는 만만치 않다.
 
좋은 남자를 만나야 마음고생, 몸 고생 안한다며 한 시간이 넘도록 당부하신다. 노을 할머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파한 좋은 남자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인물 좋은 남자도 아니요, 돈 많은 남자도 아니다. 가진 것 없어도 생활력 강한 사람이 좋은 남자라는 것이다. 37살에 혼자가 돼서 삼남매 시집장가 보내고 살다보니 어느 새 칠십 사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노을 할머니의 얼굴에는 회한의 표정이 잠시 비쳤다.
 
“나도 29살에 시집간 사람이여. 선자리가 들어오긴 했어도 시집 잘 가려고 고르다 보니까 못 갔지. 옛날에는 29살짜리가 있덜 안혀. 늙은 큰 애기라고 했어. 그때는 시집이고 다 포기하고 절에 들어가서 수발이나 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어. 그러다가 중매가 들어와서 친정엄마가 먼저 선을 본다고 상대방 집에 갔나봐. 옛날에는 지푸라기로 가마니를 쩔었거든. 근데 그 가마니가 방에 꽉 찼드리야. 그래서 가마니를 손으로 벌려보니까 나락이 그득 하드랴. 중신아비 말대로 일곱 마지기 농사를 짓는 집이 맞구나 생각했드랴. 그리고 남자를 보니까 순하게 생기고 그 동안 선 본 남자 중에 인물이 제일 낫더래. 그래서 어른들끼리 이러쿵저러쿵 하고 바로 사주단자가 우리 집으로 날아왔지. 그래서 그리로 시집을 간거야. 근데 시집을 가서 봤더니 아무것도 없어. 논 일곱마지기가 아니라 상추 갈아 먹을 밭도 없어. 그 날 밤에 하염없이 울었지. 시집 잘 가려고 이날 이때 꺼정 안 갔는데 결국 이런 데로 시집왔는가 생각하니까 눈물이 막 나더라고.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 술 좋아하고 노름 좋아하면 못쓰는 법인데 참 폭폭하게 살았지. 그러다가 애들 데리고 고향 와서 친정어머니랑 같이 살았지. 생활력 강하고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 최고야. 내가 그 말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아. 사람은 인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봐야 하는 거야. 안 그러면 이렇게 마음에 멍이 드네.”

 
노을을 보며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다.
 
이 곳 매운탕집 창가자리에 앉으면 대아 저수지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이 제법 잘 보인다. 할머니는 그 동안 논매고 밭매느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볼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일하면서 부터는 손님 없는 시간에는 이렇게 창가 자리에 앉아서 해가 지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신다고 한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참 부질없지만, 제 손으로 자식들 공부 다 가르쳤고 시집장가 가서 자기 몫을 하고 있으니 요즘은 한결 마음이 편하다고 하신다. 노을 할머니는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동네주민과 함께 배를 타고 저수지 건너편 치성터에서 햇곡식을 올리고 치성을 드리고 오셨다. 예전에 안남마을 어르신이 터 좋은 곳에 집을 지었는데 그 곳의 기운이 좋아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는 말이 전해져서 마을 주민들이 치성을 드리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사람이 많아 찾는 이들이 뜸하지만 노을 할머니는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면 늘 그곳을 찾아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정월대보름 치성 드리는 것을 한 해라도 빼먹으면 그 전에 빌었던 것들이 다 사라진디야. 그래서 치성 드리는 것은 안 잊어. 비는 것이 뭐 별 것 있간디. 늘 똑같이 빌지. 가족들 건강을 빌고, 나 아픈데 없이 잘 늙게 해달라고 빌었지.”
 
/글·사진=장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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