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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선 어디쯤 훌쩍 떠나고픈 작은 방앗간2014-05-19

전라선 어디쯤 훌쩍 떠나고픈 작은 방앗간

30년 전부터 장사를 시작한 육일방앗간. 문 앞에서 박옥심 할머니가 서울서 내려오는 딸을 기다리고 있다.
 

 

전라선 어디쯤 훌쩍 떠나고픈 작은 방앗간

 

삼례 기찻길 옆 육일방앗간
 
익산에서 시작해 여수로 향하는 전라선의 초입에 삼례역이 있다. 만경강이 흐르는 삼례뜰에  위치한 한가로운 역. 일제 강점기 때 호남평야의 곡물을 운반하기 위해 철도가 놓였고 철도운송업이 번성하면서 화물운송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삼례역 광장에는 그들이 드나들던 ‘골목집’이며 ‘버드나무집(현 광장슈퍼)’같은 선술집들이 성행했다. 늦은 밤까지 선술집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얼큰하게 취한 동네 어르신은 노랫가락 뽐내며 집으로 향하고, 기차를 놓친 어떤 이들은 역 근처 여관방에서 잠을 청했을 테다. 

 

현재의 삼례역은 근처 삼례주민들과 익산 왕궁주민들이 이용하는 비교적 조용한 역이다.
게다가 2011년에는 전라선 복선 전철화로 원래 있던 삼례역에서 남쪽으로 역사를 신축해 이전했다.
그래서 구 삼례역이 되어버린 이 곳.

 

시간이 멈춘 곳 같던 이 곳에도 변화가 시작됐다. 역 앞에 방치되어 있던 농협양곡창고는 복합문화공간 삼례예술촌으로 탈바꿈했고,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드나무집으로 불리던 선술집 자리에는 이미 오래전에 가게와 식당이 생겼다. 세월이 흘러 예전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구 삼례역 맞은편에 3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방앗간이 있다.
 

                       육일방앗간을 찾은 손님이 벨을 누르면 박옥심 할머니가 손님을 맞이한다.
 
 
시골아줌마가 무대뽀로 시작한 육일방앗간

 

흰 벽에 검은 페인트로 칠한 간판도 그대로, 나무 미닫이문도 그대로다. 삼례와 익산을 오가는 버스와 화물차가 간간히 오가는 도로가에 30년 전부터 장사를 시작한 작은 방앗간.

 

“이제는 우렁깡탱이지 뭐. 새끼들 다 키워서 시집장가 보내고 노인네 둘만 앉아서 집만 지키고 있잖아. 딸은 시집가서 서울서 사는데 보고 싶어. 멀리 있는 그림자 같아. 아들 며느리는 주말마다 보고, 딸래미도 연락 자주 하는데도, 생각하면 애잔하고 그립고 그래. 늙어서 그런가봐.”

 

길가에서 보면 운영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름철은 일거리가 많지 않아 주로 밭일 하러 나가서 가게를 비울 때가 많다. 마침 서울서 내려오고 있는 딸을 기다리느라 가게에 계시던 박옥심 할머니(70)를 만날 수 있었다.


                       박옥심 할머니가 육일방앗간 내부를 설명하고 있다.
 

“봄에 고추장감 고춧가루 뽀수고 햇쑥 나올 때는 절편하고, 여름에는 미숫가루를 많이 하지. 작년에는 미숫가루 하느라 밤낮없이 일했는데 올해는 보리 값이 올라서 일이 많이 없네. 가을에는 고추 뽀수고, 겨울에는 차례상에 올릴 떡하고 그러지.”

 

옥심 할머니는 마흔이 되던 해에 방앗간을 시작하셨다. 집에서 자식들 돌보며 할 수 있는 부업을 생각하다가 바깥 어르신이 차려준 방앗간인데 부업치고는 너무 큰 부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로 시집와서 한 번도 기계를 만져본 적이 없는 옥심 할머니의 방앗간 장사 고군분투기를 들어 봤다.

 


손님이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이었던 나날들

 

옥심 할머니는 기계를 전혀 몰랐는데 방앗간 시작하면서 손가락 하나 안 다치고 지금까지 장사를 해온 것이 참 감사할 뿐이라고 한다.

 

“겁도 없이 시작한 거야. 처음에 장사 시작할 때 원래 방앗간 하던 사람이 넘겨주면서 일주일 동안 시범운영을 같이 했거든. 근데 인절미하고 설기떡 한 번씩만 해주고 나한테 맡겨 버린 거야. 기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어떻게 시작했는지 모르겠어. 개업할 때 동네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오셔서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면서 여자가 어떻게 하냐는 식으로 비웃는 것 같더라고. 근데 오기가 생기더라니까.”
 


 

손 때 묻은 육일방앗간 기계들
 


고추가루 빻을 때 쓰는 꼬챙이
 

실수가 많았던 개업 초기에는 손님이 안와도 걱정이었지만 실수할까봐 두렵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손님이 와도 걱정이었다.

 

“요즘은 집안 잔치 있으면 식당에서 먹지만 옛날에는 환갑이나 결혼식 같은 잔치가 있을 때, 방앗간에서 떡을 빼갔어. 그리고 집에서 음식을 했거든. 모여서 음식 만드는 곳을 과방이라고 했는데, 과방에 상차림을 하면서 떡을 뽑으러 온 거야. 근데 내가 떡 만드는 걸 몰랐지. 인절미는 물을 조금씩 주면서 뽑아야 하는데 물 없이 그냥 뽑은 거야. 그랬더니 아줌마들이 떡이 뻣뻣하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손님들이 와서 알려주는 데 ‘다른 방앗간은 물을 조금씩 주면서 떡을 뽑드만 이 집은 그냥 뽐내’ 그러더라고. 그럼 물을 어느 정도 주면서 뽑아야 하는지도 궁금하잖아. 그런데 자존심 상해서 그것 까지는 못 물어 보겠더라고. 그래서 연습으로 계속 떡을 뽑으면서 알았지. 한가지로 열 가지를 배우고 실패를 하면서 배웠지. 그렇게 오늘 날까지 장사 했어. 그때 손님들이 지금까지도 단골이고 주위 사람들이 도움을 많이 줬어.” 
 

뽀수는 소리만 들어도 알아

 

30년 방앗간 장사를 하다보니까 기계소리만 들어도 멥쌀이 갈리고 있는지 찹쌀이 갈리고 있는지 단번에 구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었다.

 

“끝사리 고추하고 오사리 고추를 사람들이 구분을 잘 못하거든. 근데 나는 뽀수는 냄새로 알고 소리로 알아. 오사리 고추는 뽀술 때 잘 뽀솨져. 그리고 색깔이 곱고 선명해. 근데 끝사리 고추는 질겨서 쉽게 뽀솨지덜 안혀. 색깔은 선명하지만 찐한 맛이 없어. 깔끄럽고 냄새도 틀려. 풋내가 좀 나지.”

 

방앗간이 잠깐 비어있는 틈에 손님이 그릇에다가 물건 갔다가 놓으면 그릇만 보고 누구네 집인지 알고 그 집 입맛대로 떡을 만든다. 한 곳에서오랫동안 방앗간을 하다 보니 옥심 할머니는 동네사람들 대소사와 식성을 다 꾀고 있다.
 
 


 
 나도 기차타고 명절 쇠러 가고 싶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일주일은 밤을 새가며 일을 했어. 아침에 차례를 지내는 집에는 시루떡을 쪄서 차례지내기 전까지는 갖다 줘야 하잖아. 근데 눈은 오지, 춥기는 하지, 몇날 며칠 밤을 새서 몸은 지치지. 그때는 귀찮고 지쳐서 다 놓고 싶었는데 돈만 보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 집을 찾아온 손님이니까 차례지내기 전까지는 떡을 만들어서 그것을 머리에 이고 눈길을 해치고 떡을 갖다 주기도 했지.”

 

현재는 삼례역이 신역사로 옮겨갔지만 예전에는 역 근처에 사는 할매, 아줌들이 자식들 집으로 향하는 기차타기 전에 꼭 육일방앗간에 들렀다. 농사지은 멥쌀, 찹쌀로 떡 만들어서 가고, 집에서 재배한 고추 빻아서 만든 고춧가루를 짐 보따리에 고이 넣어서 기차타고 자식들 집으로 향했다.

 

“명절 때 남이 만들어준 떡 들고 기차타고 명절 쇠러 가고 싶어. 기차타고 여행 떠나는 것 같아 좋아 뵈더만. 넘들 떡 만드느라 내 떡 만드는 시간이 없었네.”

 

이제는 손님이 와도 걱정 없고 안 와도 걱정 없다는 박옥심 할매. 육일방앗간은 여름이 한가한 편이라고 하니 밭일 잠시 제쳐두고 기차타고 전라선 어디쯤 훌쩍 마실 다녀오셔도 좋을 때다.
 
 /글·사진=장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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