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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타스틱 데뷔작201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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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멋진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서 연극영화과에 대학 원서를 냈다. 호적에서 이름을 파버리겠다는 할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지만 ‘무대 위에서 몸을 불태우고 싶다’는 다소 황당한 다짐에 놀라셨는지 허락을 해주셨고 다행히 입학을 했다.

 

하지만 이런 복병이 있을 줄이야. 짓궂은 선배들은 신입생들을 모아놓고 ‘동기사랑’ 혹은 ‘단합’을 핑계로 허구한 날 기합주고 술 먹이는, 다소 변태 같은 행동들을 서슴지 않았다. 소심한 나는 반항한번 못해보고 타의에 의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이상한 패배감 때문에 한동안은 괴로웠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감사할일이다. 혼자 떠도는 시간에 많은 책과 영화와 음악에 심취했고 연애도 했다. 떠도는 공상들을 메모하니 그것들이 결국 시나리오가 됐다. 시련이 닥치면 이야기 거리가 생긴다.

 

그렇다고 시련이나 고통을 즐기는 취향은 아니지만 시련은 언젠가는 지나가는 것이고 그것들이 지나가는 동안 되도록 재미있는 생각을 하면 된다.

 

학교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몇 해 전, 청소년들이 제작한 영화들을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일상이 답답하고 괴롭지만 그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는다. 무작정 옥상으로 올라가 괴로워하고 분노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러다가 탈출을 계획하고 바다로 떠나 모래사장을 거닐며 자유를 느끼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청소년들의 답답한 마음은 이해한다만 천편일륜적인 이야기들 때문에 어느 청소년 영화제 심사위원은 ‘옥상’이나 ‘바다’가 나오는 영화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요즘 어린이 영화제작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에게 어떤 주제의 영화를 찍고 싶냐고 물으면 공통되는 몇 가지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키워드로 정리를 해보면

 

 ‘학교폭력, 왕따, 막장드라마, 아이돌, 연애, 똥, 방구’.

 

아. 어둡고 칙칙하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학교폭력이나 왕따는 아이들이 직접적으로 느끼는 문제이다. 뭐든지 넘쳐나는 세상에 아이들은 자극적인 것들에 빨리 반응하고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른 것들을 찾는다. 어둡고 칙칙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무조건 밝고 착한 이야기만을 끌어 낼 수는 없다.

 

얼마 전 완주의 한 초등학교 영화동아리 아이들이랑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그 친구들 역시 요즘 아이들의 공통되는 키워드를 외쳐댔다. 융합의 시대인데 이 모든 주제를 섞어버리자고 바람을 잡았고 그래서 순식간에 시놉시스 하나가 완성됐다. 이름 하여 ‘좀비사용설명서!’

 

학교에 숨어 지내는 좀비소녀와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왕따 소년의 연애 이야기다.

 

숨어 지내야만 하는 좀비소녀가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을 지켜보다가 결국은 도와주게 되고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그 와중에 똥과 방구도 등장할 예정이다.

 

정신없이 아이디어를 외쳐대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줄거리와 인물간의 관계, 전체적인 구조를 만들어 냈다.

 

그래놓고는 “이걸 어떻게 영화로 찍어요!” 그런다.

 

애들아, 너희들 막장드라마 좋아 하잖아. 막장드라마가 별거니, 욕먹어도 계속 끌고 가는 용감함이다. 되도록 관객들에게 욕먹을 영화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용감하게 찍으면 된다. 너희들의 판타스틱한 데뷔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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