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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듯 익숙한 저 문을 열면...2014-04-23

초라한 듯 익숙한 저 문을 열면...

초라한 듯, 낯익은 저 문을 살며시 열면… 아! 마음 가득 펼쳐지는 이 익숙한 풍경
 
 
 
뽀글뽀글 할머니파마의 온상지, 고산터미널 옆 해정미용실
 
 
봉동으로 시집 온 청주처녀 명규씨
97년 미용면허 따고 첫 개업
터미널 옆 가게서 13년째 가위질
 
이젠 고산읍내 미용실만 12군데
손님 줄어 장사 어려워졌어도
사드락 사드락 오래 하다
미용실도 이 자리서 졸업해야지

 
할머니들의 상징, 곱슬곱슬 파마머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유행했던 것일까.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한국전쟁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내다 팔 수 있는 것 중 가장 품질이 좋았던 것은 가발이었다고 한다. 아낙들은 가족들 먹일 쌀을 마련하고자 쪽진 머리를 풀어 잘라내고 머릿수건을 썼다. 세월이 지나고 간편한 짧은 머리가 익숙해지면서 불에 달군 쇠집개 따위로 머리카락을 꼬불꼬불하게 하던 ‘불파마’가 대 유행했다. 이로써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이 탄생했고 현재는 일명 ‘할머니 파마’ ‘뽀글머리’등으로 불리 우고 있다.
 
한 세기를 넘어서까지도 아낙들에게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는 영원불멸의 헤어스타일 ‘할머니 파마.’ 꽃샘추위가 맵던 어느 봄날, 할머니 파마의 온상지 고산 읍내 어느 미용실을 찾았다.
 
 
오다가다 쉬었다가는 터미널 옆 미용실
 
고산터미널 한 편에 붙박이장처럼 붙어 있는 해정 미용실.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버스를 기다리느라 터미널에 정처 없이 서있을 때 가끔 미용실 문틈을 엿보곤 했다. 좁은 미용실 안에는 뽀글머리 할머니들이 서너명 난로 앞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여름에는 아예 문을 활짝 열어놔서 제 2의 대합실이 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용실 벽 한쪽에 버스시간표를 빼곡히 적어놓은 종이가 붙어있다.
 
“여기는 쉬었다 가는 사람들이 많아. 터미널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우니까 버스 기다리면서 우리 집에 와서 쉬었다 가지. 머리 안하는 사람들도 많이 오지. 들어와서 물건 맡겨놓고 나가서 볼일 보러 다니다가 와서 짐 찾아서 가지. 어떨 때는 문 닫힐 새가 없이 왔다 갔다 해.”
 
 
14-미용실 내부.jpg
고산터미널 한 켠에 자리잡은 해정미용실 주인장 송명규씨가 단골할머니의 파마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송명규(55세)씨는 충청도 청주가 고향이다. 봉동에 사는 신랑을 만나 완주에서 살게 되었고 아이 둘 낳고 무슨 일이든 해볼 요량으로 집에서 미용 책을 보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필기시험 합격 후 익산의 한 미용실에서 실습생으로 공부하면서 1997년에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다른 미용실에서 보조미용사로 일을 하다가 1999년 고산 독촉골 근처에 미용실을 개업했다. 자신의 이름은 남자이름 같아서 큰 딸 이름을 따서 ‘해정 미용실’이라고 가게이름을 지었다. 길이 외져서 지나는 사람이 없자 2001년경에 지금의 고산터미널 옆에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다.
 
“내가 미용실 하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기사식당도 했다가 분식집도 했다가 업종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데. 그래도 주변사람들이 그러는데 내가 제일 오래있다네. 농사지을지도 모르고 배운 기술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냥 세월아 네월아. 사드락 사드락 하는 거지. 이제 어디로 안 옮기고 여기서 오래 하다가 미용실도 졸업해야지. 근데 이 작은 고산 읍내에 미용실이 열두 군데나 생겼어. 장사하기 힘들지.”
 
몇 년 전에 비해 장사하기 힘들어졌다고 한다. 처음 개업할 당시만 해도 미용실이 많지 않았는데 갑자기 한 두 개씩 생기면서 현재는 고산 읍내에 미용실이 12개나 있다.
 
내부를 산뜻하게 단장한 미용실부터 젊은 미용사들의 친절한 서비스가 특징인 미용실도 있다.
 
“아무래도 손님이 많이 떨어졌지. 미용실이 많이 생기다 보니까. 그리고 단골손님들이 많았는데 그새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신 분들도 계시고, 손님들이 많이 줄었지. 한창 잘 될 때는 하루에 10명 넘게도 파마를 말았어. 그때는 아침, 점심도 못 먹고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도 참고 파마를 말았지. 그래도 그때는 낭만이 있었네. 파마를 말고 있으면 손님들이 먹을 거를 사가지고 와서 입에 넣어주고 그랬지.”
 
 
14-가위손.jpg
14년 곰삭은 명규씨의 가위질 솜씨. 예전엔 이렇게 파마를 말고 있으면 손님들이 입에 먹을 걸 넣어주곤 했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을 상대하다보면 가끔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옛날에는 손님이랑 싸운 적도 있었지. 머리를 하고 머리 값을 안줬는데 줬다고 우기는 거야. 자꾸 우기니까 아 미칠 노릇이네. 근데 어쩌겄어. 그냥 봉사한번 했다고 생각하고 그냥 다음에도 또 오시라고 보내 드렸지.”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친정엄마 같은 할머니 손님들이 있어 위안이 된다.
 
얼마 전에는 늘 오시던 할머니 한 분이 얼굴이 노래져서 들어오셨단다. 잠시 앉아 있다 나가시려는 것을 송명규씨는 억지로 앉혀두고 수지침으로 열 손가락을 다 따줬다고 한다. 그제 서야 혈색이 돌아왔고 소화제 하나 마시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 가셨다고 한다. 다음 날 할머니는 미용실에 찾아와서 쌍화탕 하나 내밀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단다. 단골손님들과의 소소한 정 때문에도 미용실 문을 닫을 수 없다.
 
 
한바탕 수다와 위로, 치유가 있는 곳. 미용실
 
병원 문 여는 시간, 9시에 맞춰 고산 읍내에 나오신 할머니들은 붐비는 병원에서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는 시간에 미용실로 모인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뽀글 머리는 보통 한 달이 지나면 풀리기 시작한다. 파마머리를 말고는 병원 가서 1시간 동안 물리치료를 받고 미용실로 돌아와 중화제뿌리면 파마가 마무리 된다. 그 사이에도 짐을 맡겨놓고 볼일 보러 돌아다니는 손님부터 어떤 날은 마실꾼들만 하나 그득 앉아 있을 때도 있다. 미용실 안은 온갖 이야기가 가득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부터 때로는 누구의 욕도 하며 그간 쌓인 화를 한 바탕 풀어내신다. 병원이 몸을 치료하는 곳이라면 미용실은 수다를 통해 응어리를 풀어내는, 마음을 치유하는 곳이겠다.
 
 
14-고맙지.jpg
“파마 참 잘 나왔네…” “따듯하게 입고 가시고 풀리면 또 오세요”
 
“여기 있다 보면 배우는 것도 많아. 하도 사람들이 와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니까. 바깥에 안 나가도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어요. 사실 듣는 것도 일이거든. 좀 힘들 때는 반대로 내가 어머니들한테 하소연을 해. 그럼 친정엄마처럼 나를 위로해주기도 하지. 자네 보다 못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힘내서 살으라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묵묵히 시간을 견디며 그 자리에 남아있는 할머니들의 사랑방, 시골 미용실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글·사진=장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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