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할아버지와 다람쥐들 '귀여운 동거중' 2013-06-07
- 첨부파일
- 32.jpg
이제민 할아버지는 말년을 조용히 보내려 친척이 살던 집을 손봐서 20년 전부터 이곳 쑥재골(내아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서 다람쥐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많은 다람쥐가 하필이면 이제민 할아버지 집으로 내려와 동거를 시작했고, 조용히 살고 싶었던 할아버지는 심지어 다람쥐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다람쥐에게 지극정성이다.
“여기는 산골이라 겨울에는 시내보다 온도가 3~4도 낮아. 그래서 겨울에는 다람쥐 집 둘레를 비닐로 싸주고 집안에 열선을 넣어 줘. 그냥 열선을 넣으면 이 놈들이 긁어버리기 때문에 프라스틱 파이프 안에 열선을 넣어서 자동타이머 달아놓고 적정온도를 맞춰 놓으면 자동으로 온도가 올라갔다 떨어졌다 하니까 화재 날 염려가 없지. 내가 전기 기술이 있어서 그런 것은 기술자 부르덜 않고 직접 만들어.”
할아버지 마당 한 켠에는 옥수수와 해바라기 싹이 자라고 있다. 그 동안은 다람쥐 사료를 사서 먹였는데 사료 값이 만만치 않아 올해부터는 다람쥐 먹이용으로 옥수수와 해바라기를 재배하기로 하셨다. 봄에 씨앗을 심었는데 지금은 한 뼘 크기로 자랐다. 좀 더 자라면 솎아서 옥수수 200주, 해바라기 200주를 텃밭에 옮겨 심을 계획이다. 사람 먹을 농사는 안 지어도 다람쥐 먹일 요량으로 농사를 시작하셨다. 그래도 사람 먹을 것은 있으니 여름이 되면 옥수수 얻어먹으러 오고, 가을이면 노랗게 핀 해바라기 구경하러 오라 하신다. 술은 끊어도 인이 박혀서 못 끊겠다는 한라산 담배 한 보루 사들고 다시 찾아가야겠다.
“한 4년 전인가, 남관에서 일보고 들어오는 길에 저 놈의 개가 자꾸 따라오네. 가라고 으름장을 놔도 계속 쫓아와. 나중에는 내 집이 어딘 줄 알고 지가 앞장을 서더랑게. 집으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와서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모르는 개라고 그려. 그래서 그냥 같이 살게 되얏지. 이름도 안 지어 줬어. 그냥 ‘야’라고 부르고 말 안들을 땐 ‘멍청이’라고 부르고 그러지”
옆집의 고양이들도 자꾸 할아버지 집으로 놀러온다고 한다. 연탄창고에 들어가 쥐 잡는다고 들쑤셔 놓고 까만 연탄가루 뒤집어쓰고는 할아버지 집 마루에 올라와 천연덕스럽게 낮잠을 즐기곤 한단다.
“처음에는 우리 집 개가 고양이 오면 짖더니만 나중에는 자주 보니까 이물 없이 지내더라고. 원래 고양이랑 개는 상극인데 우리 집 개는 고양이를 봐도 그냥 내버려 둬.”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집 앞마당에는 토끼, 노루, 너구리, 꿩 등 야생동물 손님이 자주 출몰하곤 했는데 요즘은 아예 발길이 끊겼다.
“꿀벌을 키웠었는데 핸드폰 사용량이 늘면서 꿀벌이 찾아오지 않아. 조사를 해봤더니 벌이 방향감각이 예민하잖아. 근데 휴대폰 전파 때문에 벌이 방향감각을 잃어서 꿀 찾으러 나갔다가 집을 못 찾아오고 그냥 죽는 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 동네 매실, 밤 생산량이 많이 줄었지. 또 농작물에 뿌리는 약 때문에 그걸 먹고 죽어버리는 거지. 사람 먹고 살자고 다른 것들을 다 죽이는 거지. 사람 편리하게 살자고 말이야.”
한창 바쁜 농사철, 할아버지는 집 한 켠에 작은 텃밭만 있을 뿐인데 덩달아 바쁜 나날이다. 며칠 전 동네 사람이 농약방제 기계 엔진이 안돌아 간다고 급히 호출을 해서 고쳐주고 오셨다고 한다.
“농약을 줘야 하는데 엔진이 안돌아간다 이거야. 가서 보면 고장이 아니라 대부분이 관리 소홀이여. 원인이 뭐냐면 휘발유를 한 해만 써야지 묵혔다 쓰면 안돌아가. 휘발유 통을 깨끗이 비우고 새로 기름을 넣어야지. 그리고 플러그를 세심하게 청소해야 하는데 가서 보면 기름때로 쩔어 있어. 그럼 스파크가 다른 데로 새거든.”
동네사람들 농기계나 전자제품이 고장 날 때면 언제나 출동해서 붙여진 별명이 맥가이버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욕심이 없다. 부품 값만 몇 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한꺼번에 받는다고 그냥 돌아갈 때가 더 많다.
기계 고치는 일은 아무나 못하는 일이니 출장비나 기술비를 받을 법도 한데 할아버지는 부품 값만 받는다. 매번 같은 문제로 호출을 하니 할아버지는 아예 기계사용법부터 간단하게 고치는 법을 알려주기 까지 하신다.
다람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전자제품 사용법
고등학생 때부터 기계 다루는데 소질이 있으셨다고 한다. 간단한 원리만 알면 뭐든지 고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간단한 원리가 도대체 뭐냐고 물었더니 “도라이버하고 펜치만 있으면 뜯어가지고 탈탈 털어 버리면 되는 것을. 간단하잖여.” 하고는 너털웃음을 웃는다.
“우리 집 물건은 다 오래됐어. 고장 나면 내가 다 고쳐 쓰니까. 냉장고가 지금 몇 년 되었냐면 45년 썼어. 낡아 보이지만 다 멀쩡해. 간단한 고장으로 2~3천원이면 고칠 수 있는데 20~30만원 걸려 고친단 말이여. 그게 다 몰라서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든단 말이여. 요즘 사람들은 고장 나면 아예 새로 사버리고 하잖아. 옛날에는 생활이 어려우니까 가전제품을 고쳐서 쓸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더라고. 살기가 좋아졌잖아. 그때 그때 유행을 따라 가더만. 예지간한 것은 5년을 않쓰더라고.”
15년 전에 시작한 집수리일과 목수일도 엊그저께 정리를 하셨다. 백만원 상당의 작업 연장들을 친구에게 그냥 넘겨줬다고 한다. 힘이 닿는 한 동네사람들 물건이 고장 나면 고쳐주고 집수리도 쉬엄쉬엄 하고, 그저 한라산 담배 한 값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 하신다. 이른 아침 찾아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잠이 깨고 오전 내 마루에 앉아 다람쥐 노는 걸 지켜보는 것에 만족한다는 이제민 할아버지.
고전평론가 고미숙씨가 어느 책에서 이야기한 임서기(林捿期)란 말이 생각났다.‘숲에서 명상을 하는 기간. 자식은 이미 자랐고, 사랑의 폭풍은 잦아들었으며 직업에서의 성취도 한 마디를 지났다.’
할아버 지는 쑥재골 밤나무 숲 속, 작고 정갈한 집에서 임서기(林捿期)를 한창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