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의지하며 살면 외로울 일 없지" 201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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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나오는 배관이 터져 계속 모터가 돌아갔을 거라는 검침원 말에 김 할머니는 사위에게 고치러 오라 부탁했다. “올 겨울에는 다들 전기요금이 많이 나왔다”며 서로를 걱정했다. 따로 사는 할머니들은 마치 한 가족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할머니들에게 궁금한 게 참 많았다. 심심하거나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옛날부터 여기는 도둑도 없고 무섭던 안해. 그렇게 한 30년씩 혼자 살아도 심심한 줄 몰라. 하나님 믿고 살아서 거기에 의지하니깐 괜찮아.”
가장 윗집이자 마을 큰 언니인 문안녀 할머니는 먹방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날도 할머니들은 문 할머니 집에 모여 정담을 나눴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시골밥상처럼 정갈했다.
문안녀할머니
문안녀(84·세례명 아네스) 할머니는 먹방마을이 고향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마을 주변으로 들어온 신랑을 만나 7남매를 낳고 평생 살고 있다.
“19세에 시집을 갔는디 내가 시집을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신랑이 농사 지어 먹을라고 마을로 이사를 왔어. 나바우(여산) 밑에 해밀(함열) 와리에서 살다가 한 3년 만에 이쪽으로 이사왔지. 그렇게 만난 남편은 57살에 저세상으로 갔어. 한 30년 됐지. 남편은 밖에 나가서 살고 싶다 했는데 이곳 떠나면 죽는 줄 알고 그냥 살았지. 그래서 이렇게 고생하지 누구 원망도 못해.” 은행 다니는 며느리를 대신해 손자를 돌보느라 보낸 대구생활 5년이 세상구경의 전부다. 자녀들은 서울, 대구 등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보리밥도 변변히 못 먹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문 할머니는 노상 양촌장을 오갔다. 충남 논산 양촌은 여기서 50리 길이다. 하루라도 빠지면 굶어죽는 줄 알았다. 싸리로 채반을 만들어 팔았다. 소쿠리, 광주리도 만들어 팔고 다녔다.
할머니 기억에는 먹방마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 때도 다섯가구를 넘지 않았다.
당시 논밭을 일구려면 소가 필요했는데 마을에는 소가 없었다. 해서 아랫마을(원구제)에 부탁한 뒤 품앗이로 삯을 치렀는데 소 하루 빌린 값으로 이틀을 일 해줘야 했다. 하루는 소 품삯, 또 하루는 소 부린 사람 삯이었다. 소가 없으면 이래저래 힘들었다. 나이 들어 인근 마을사람들에게 땅을 내주고 조금만 밭떼기에 채소를 갈아 먹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고라니 등살에 힘들다.
문 할머니는 지금도 한글을 배우지 못한 게 가장 한이다.
“그 옛날 되재에는 공립학교가 있었다. 그때 1학년만 다녔어도 국문이라도 배웠을 텐데 계집이 학교에 가면 어떻게 살림할 것이냐는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언문을 못 배워 삼 삶고 길쌈 놓으며 평생 그렇게 늙었다. “시방도 국문을 하나도 몰라. 국문을 조금만 배웠어도 이렇게 살지는 않을 텐데.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데 뭣을 알겄어.”
그래도 할머니는 7남매가 속 끓이지 않고 잘 자라줘 고맙다.
“우리 엄니 이 골짜기 사는 거 너
심금순 할머니
심금순(78・세례명 마리아) 할머니는 서른 둘에 논산 황하에서 시집왔다. 벌써 55년 전이다. 전실 자식들과 딸이 하나 있는데 명절 때면 모두 내려온다. 남편은 문안녀 할머니 부군과 같은 해에 돌아가셨다. 나락심고 가셨는데 더 젊은 나이였다.
할머니는 일만했다. 옛날에는 고사리며 취가 많아 뜯어 팔았다. 하지만 미국소나무가 심어진 뒤 고사리가 사라졌다고 할머니는 아쉬워했다.
봄가을 먹방마을은 겨울과 달리 찾는 이가 많다. 순례객이나 약초 캐는 사람들, 등산객들이다. 가을에는 산초 약초 캐는 사람들이 등에 니쿠사쿠(배낭)를 짊어지고 온다. 봄 되면 자가용이 끊이질 않는다. 등산객들이다.
할머니는 “옛날 젊어서는 밤도 질고 해도 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낮에 일을 해야 하는데 산골이라 해가 짧아서 아쉬웠다. 일찍 자면 지루하기도 했다. 다 옛날이야기다.
할머니는 여기서 살아 명만 긴 것 같다며 도시서 살았으면 이렇게 못살았을 것 이라고 했다. “안 좋은 음식 안 먹고 해서 명만 진 것 같다”고 했다. 또 여기 사람들은 다 천당 갈 것이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먹방사람들은 법이 없어도 살게 생겼어. 뭐를 봤어야지. 그 얼굴이 그 얼굴인디.”
5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로 건강이 나빠졌다. 지난해까지는 한 1년 병원신세를 졌다. 좀 나아져서 집에서 보낸다. 많이 호전됐지만 작년부터 농사는 못 짓고 있다. 올 겨울에는 얼어서 물이 안 나오고 모터보일러가 고장 나 돈이 많이 들어갔다. 해서 날 풀리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문안녀 할머니와는 시누이 올케 지간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큰 소리 말 한마디 안하고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같은 신앙을 갖고 욕심없는 생활을 하는 게 삶의 낙”이라고 했다. “심심하겠다고 하는데 안심심해. 양로당 하나만 있어도 날마다 웃고 지낼 텐데….” 할머니는 이곳에서 5남매를 키워냈다.
살아온 얘기를 풀어 논 할머니들은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도 치매걸리고 하는데 여기서 치매 안 걸리고 사는 게 행복”이라고 했다. 죄도 안 짓는다는데 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아무것도 몰라도 신앙의 힘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믿고 살았다”고 했다.
“암만 사람이 살다보면 내외간도 싸우는디 하물며 넘(남)들인데 갈등이 없기야 하겠어? 늙어가면서 등지고 사는 게 의지가 있고 혼자 사는 것 보다 낫지.”
할머니들은 겨우내 봄을 기다렸다. “뜨겁도 않고 춥도 않고 꽃피는 2~3월, 4월 그때가 젤 좋지. 밤도 질은 것 안 같고 아래 윗집에서 놀다가 버떡하면(금세) 날 새는 것 같고.” 그리고 여든 청춘들에게 다시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