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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28] 밀주(密酒)의 시대2024-04-18

[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28] 밀주(密酒)의 시대


밀주(密酒)의 시대

 

태국인 친구 펀은 십여 년 전 한국에 왔을 때 쌀밥이 먹기 힘들었단다. 한국살이 십 년이 넘어도 여전히 한국의 쌀밥이 맛이 없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된장국, 청국장도 아니고 쌀밥이 맛이 없다니, 맛의 기억은 지문과 같아서 평생 먹어온 쌀밥에도 기호가 있을 수 있구나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일제강점기 이후 양조장이 생겨나고 우리 누룩이 아닌 일본 누룩으로 빚어 쌀이 아닌 고구마나 밀가루로 빚은 막걸리를 사서 마셔야 했던 시대에 사람들이 밀주를 빚던 것은 단지 국가정책에 반하는 불법행위로만 바라볼 문제가 아니었다. 조상 대대로 빚어 마셔왔고, 정성껏 빚은 술이라야 제사상에 올릴 수 있었던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위험천만한 저항이기도 했다.

 

식량난 해결을 위해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하는 양곡관리법이 1965년에 개정되고 밀주 단속은 더욱 강화되었다. 헛간에 구덩이를 파고 술독을 묻거나, 술독 위에 김치나 젓갈을 덮어 단속을 피해야 했다. 이러한 행태를 모를 리 없는 세무공무원들은 쇠꼬챙이가 달린 긴 막대를 들고 마당이며 시렁, 짚단을 들쑤시며 숨겨둔 누룩이며 술독을 매섭게 찾아냈다고 한다. 충남 당진의 유명한 짚가리술은 추수가 끝나고 볏단을 높이 쌓아두는 짚가리 속에 술독을 숨겨두면서 유래한 술이다. 충남 아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한 할머니에게 짚가리술을 얻어 마신 후 그 맛에 반해 대통령의 회갑연에서도 짚가리술을 마셨다고 한다. 본인의 통치 기간에 만들어진 법을 위반한 술을 맛본 대통령이 그 술맛에 반해 유명해진 술이라니 쇠꼬챙이가 달린 막대기만 보면 벌벌 떨던 민초들에게는 맥이 풀리는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오래전 소설 <모래네 모래톱>의 저자인 이병천 소설가의 기억으로 들었던 한 장면이 있다. 작가가 어린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보았던 친구의 어머님에 대한 기억이었다. 단속반이 나타나 집에 있는 술을 내놓으라고 하자 친구의 어머니는 빚어놓은 술항아리를 들고 나와 마당에 내동댕이 쳤다고 한다. 술독은 산산조각이 나고, 사방으로 쏟아져 흘러내리는 고두밥알과 술이 뒤섞여 술향기가 온 마당에 퍼졌을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못마땅한 상황이었으면 그토록 아까운 쌀로 애써 빚은 술독을 깨트려 버렸을까. 단속반의 위엄 앞에 두려움도 잊은 한 여인의 분노와 당당함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술은 환경적 요인이 매우 중요한 음식이다. 좋은 원료, 깨끗한 물, 곰팡이와 효모가 잘 자리잡힌 공간에서 술을 빚어야 한다. 잡균에 오염되지 않도록 도구를 깨끗이 소독하고 날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도구나 손을 말린 후 사용해야 한다. 게다가 술을 숙성시키려면 깨끗한 공간에 놓아두어야 할 터, 김칫독이나 젓갈독, 짚가리에 넣어 술독을 보관했다면 그 술맛을 어떻게 짐작해야 할까 싶다. 1983년에 전국 12개 시도에서 자체 민속주 조사를 통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46종의 전통주 제조기법에 관한 조사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문화재적 가치나 보존의 필요성을 근거로 문배주, 경주교동법주, 면천 두견주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나머지 술은 시도무형문화재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민속주에 대해서는 당시 교통부의 추천으로 18종의 주류가 관광토속주로 지정되었다. 밀주의 시대를 견디고 살아남은 술들이 우리술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역사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 유송이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 사진출처: 비주, 숨겨진 우리술을 찾아서(허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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