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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별곡] 어쩌다 왕궁터에 꽂힌 날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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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왕궁터에 꽂힌 날



겨르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고산권벼농사두레 대표라는, 나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지 달포 남짓. 때마침 농한기를 만나 바쁠 일도 없으니 그야말로 유유자적, 하루하루가 느긋하다. 불현듯 이리 태평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밀려들기도 한다.


왜 안 그렇겠나. 여느 해 같으면 <농한기강좌>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바삐 움직일 때 아니던가. 몇 차례 기획 회의에, 강사 섭외에 눈코 뜰 새가 없었을 즈음이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집행부가 올해는 강좌를 쉬어가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설령 지속하기로 방향을 정했더라도 거기 내가 끼어들 일은 없다. 농한기강좌를 열지 않는 대신 조촐히 정월대보름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그 준비작업 또한 내가 맡을 몫은 없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조바심이 이는 건 그동안 몸에 밴 관성탓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다. 안 그래도 짐을 내려놓은 홀가분함을 누리려고 벼두레 단톡방을 잠시 빠져나와 있다. 어디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란 이런 것이지 싶다.


시간을 다퉈 이뤄야 할 목적이 없으니 여유만만이다. 어디 나다닐 일도 거의 없어 그저 내키는 대로, 짚이는 대로 책을 펼친다. 철학과 역사, 사회과학을 넘나들고, 생태와 페미니즘을 가리지 않는다. 소설 한 권 다 읽고도 해가 남아 있으면 산책인지, 운동인지 뒷산을 오른다. 그러다 활자 무더기에 짓눌릴 즈음 주섬주섬 외출복을 걸치고 홀로 영화관을 찾는다. 그 넓은 상영관을 혼자 전세 낸 날도 있었다. 누군가 객쩍은 핑계로 술판을 벌인다 한들 마다할 까닭이 없다. 등산동아리 사니조아에서 12일 짜리 산행을 잡더라도 부담스럽지 않다. 간밤 무리를 하는 바람에 산 중턱에서 나홀로 회군하는 사달이 난들 어쩌란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유붕자원방래, 멀리 사는 벗이 지나는 길에 느닷없이 찾아들었다. 그래도 거리낄 게 없다. 주거니 잣거니 쌓인 얘기를 풀다 보면 밤이 깊은 줄도 모르는 법. 국밥 한 그릇으로 속을 풀고 벗은 귀로에 나선다. 왕궁터미널에서 고속버스표를 끊고 보니 한 시간 남짓 여유가 있었다. 바로 옆 백제왕궁터로 안내했다. 때마침 영하의 추위에 바람까지 맵차 서둘러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별일이다. 자꾸만 그 궁성 옛터가 떠오르는 거다. 참지 못하고 다음 날 그곳을 다시 찾았다. 먼저 박물관을 찬찬히 훑은 다음 건물터와 후원, 화장실, 공방 유적까지 샅샅이 둘러봤다. 집에 돌아와서도 네댓새를 관련 영상자료는 물론 문헌자료까지 훑고 나니 백제 무왕 익산(금마) 천도설의 윤곽을 꿰게 되었다.


어쩌다 왕궁터에 꽂히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최근 다시 불거진 전주-완주통합 논란의 영향이지 싶다. 이미 세 차례나 부결된 주민투표 결과를 보더라도 완주군민의 통합반대 정서는 완강한 듯하다. 나아가 기후위기를 맞아 경제성장이 더는 시대정신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규모의 경제논리는 새만금 개발만큼이나 시대착오로 보인다. 반면 전주를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길게 벋은 완주군 영역은 생활권이 다르고 자치행정에 어려움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래, 그 옛날 금마백제 왕성 중심으로 펼쳐졌던 수부(首府)를 오늘에 재현하면(이 경우 그 영역은 왕궁-여산-삼례-봉동-고산권을 아우른다) 어떨까 하는. 물론 실현가능성 없는 몽상일 뿐이다.


언제까지 이렇듯 유유자적, 여유만만한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이제 설도 쇠었고, 대보름 지나 농사철이 임박하면 농한기도 막판에 다다른다. 좋은 시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 차남호(비봉 염암마을에 사는 귀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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