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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17]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2023-05-16

[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17]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고성가도(固城街道)

백 석


고성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은

해밝은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참 퓌였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흔 건반밥을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 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건반밥: 약밥, 인절미 또는 술을 빚기 위해 찹쌀이나 멥쌀을 물에 불려 시루에 찐 고두밥, 지에밥이라고도 함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은 마음에 둔 한 여인이 사는 통영에 가던 길에 고성의 어느 마을을 지나며 이 시를 썼다.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의 마을 풍경이다. 고성장 가는 길에 개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는 조용한 마을에서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어느 집 마당 귀퉁이에 밝은 햇빛을 받아 눈이 시리게 고운 흰 고두밥이 널려 있다


잔치에 쓸 꽃술을 빚으려는지 시루에 쪄낸 새하얀 고두밥에 개나리, 진달래가 뿌려져 있었나 보다. 널찍한 멍석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고두밥에 울긋불긋 봄꽃이 뿌려진 풍경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작년 가을에 거둔 곡식은 이미 떨어지고 풀뿌리 죽을 끓여 끼니를 때워야 하는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식민지 시대의 봄날, 멍석에 널린 소복한 쌀밥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멈춰서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풍경이다


즐거운 잔치를 앞둔 그 마을에는 당홍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은 새악시들이 깔깔거리며 마냥 웃고 살 것만 같은 넉넉한 여유를 느끼며 시인은 불원천리 찾아온 남도에서 만나기를 고대하는 한 여인을 동시에 떠올렸을 것이다.


술을 빚기 위해 고두밥을 쪄서 넓은 발에 천을 깔고 펼쳐 놓으면 방안은 온통 구수한 냄새가 진동한다. 쌀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밥의 냄새다. 뜨거운 증기로 쪄낸 밥알은 쌀의 형태를 잃지 않고 알알이 살아있다


투명하게 익어 번들번들 윤이 나는 밥을 주걱으로 펼칠 때 나는 미안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엄습한다.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지 않고 유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사는 나는 술을 빚기 위해 아무런 걱정 없이 쌀 1말로 고두밥을 찔 수 있다


섬마을 처녀들은 태어나서 시집갈 때까지 쌀 1말도 못 먹는다는 과거 세대의 고생을 알지 못하며, 우리 세대가 소진하고 있는 지나친 풍요로 인해 미래 세대에게 이 같은 풍요를 물려주지 못하리라는 걱정 때문이다. 꽃들은 순서도 없이 화들짝 피는데 붕붕거리는 벌떼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막한 봄날에 나는 어느 집 마당에 널린 눈이 시리게 고운 고두밥을 보고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즐거운 마을을 상상하는 시인 백석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유송이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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