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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노래]19. 개구리와 슈베르트2022-06-22

[사람의 노래]19. 개구리와 슈베르트

사람의 노래

⑳개구리와 슈베르트


 

낮이 정말 덥게 느껴지던 5월 언젠가부터 해가 지는 저녁이면 일찍 퍼지기 시작했다. 낮에 농사를 짓는것도 아니면서 시원한 저녁이면 쇼파에 대자로 누워 핸드폰을 얼굴에 들이밀고 뒹굴거리는 시간이 꽤나 만족스럽다. 앞뒤로 문을 열어 놓고 바람 솔솔 맞으며 이런 저런 동영상을 둘러보며 의미없는 삼매경에 빠졌다가, 잠시 정신을 차린다.

개구리가 울어댄다.

몇 마리 쯤일까 상상도 안 될만큼 크게 울어댄다.

이장님댁 앞에 논이 있고 그 큰 논이 청개구리로 가득차 있고, 그 사각형 논이 내 방의 육각면을 채우고 그렇게 개구리가 다닥다닥 머리 위에서 울어대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서라운드로 울고있다.

내가 핸드폰만 손에서 놓아도 들을 수 있는 소리인데, 이렇게 크게 들리는데, 언제부터 울고 있었을까? 분명 얼마 전 마당에서 불멍을 할때는 이렇게 크게 안 들렸었는데 왜 난 못 들었을까?


나를 완주에 앉힌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감탄하며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결국 내가 전혀 인지하지 못하며 살았던 것들에 대한 간단한 깨달음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인것 같다.

내가 들어야 할 소리는 내가 정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지배했었고, 모든 면에서 그런식이었다. 지금에야 얼마나 황당한 생각이었는지 조금씩 깨닫고 있다.

여기서 만난 할머니들이 시집을 온 집에서 아이를 낳고 살다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사를 가지 않으시는 것을 내가 이해 못하는 것처럼, 나도 내 고향의 피상적인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을 많지 않다. 들리는 것들을 듣고, 열린것을 먹고, 떨어진 것들을 주워서 어디선가 본것을 기억해 조합하는게 내가 할 수 있는것의 전부 일지도 모른다.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An die Musik)’가 생각났다.

작곡을 많이 한 음악애호가였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살아서는 빛을 못 보고, 사후에야 음악성을 인정받은 안타까운 작곡가이다. 열악한 가정환경, 제대로 풀리지 않은 작곡가의 인생이 작곡가에게는 가슴아프지만, 그 댓가로 우리는 음악에 대한 열정만을 위해 작곡된 작품을 들을 기회를 얻었다.

그 시대 궁정음악가로써 받은 돈만큼의 기획된 기능음악을 작곡하고, 사회적 지휘만큼의 작곡 능력을 화려한 기법으로 증명해 내야했던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아무 부담없던 슈베르트는 음악에처럼 그냥 간단하고 조촐한 선율을 쓰고 그것을 울리도록 놔둘 수 있는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가사가 붙은 멜로디와 피아노의 왼손반주가 함께 노래하는 듯한 짧은 선율이 반복되는 곡으로 사실 지금도 그렇게 좋아하는 곡은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어릴 적 정말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곡이다. 하지만 한가지 더 확실한 건, 나는 이런 간단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곡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덮어 씌우고, 복잡한 듯 보이고, 잘하는 척 하는것처럼 보이는, 편성이 큰 곡을 쓸 능력이 내게 있다. 더운 여름날, 논의 청개구리 울음을 들은 슈베르트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본 작곡가의 비극적인 차이라고나 할까.

쉽지는 않겠지만 나도 언젠가는 진심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눈만 뜨면, 귀만 열면, 나도 듣고 노래 할 수 있다.

  

김민경(완주문화재단 한달살기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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