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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아 너도 늙었고 나도 참 많이 늙었구나! 2022-05-19

흙집아 너도 늙었고 나도 참 많이 늙었구나!

외율마을 이정수 할머니 이야기


휑하던 마을회관 앞에 어르신들의 보행기들이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2년 동안 닫혀있던 마을회관 문이 비로소 열렸다. 둥그렇게 모여 앉아 얼굴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잡아보는 것. 평범하고 당연했던 일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외율마을 여덟 할머니들은 요즘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그림을 그리고 한글을 배운다. 이사 온 젊은이가 할머니들 적적하실까봐 벌인 작당모의인 것이다. 이제 허리 아파 밭일도 못하신다면서 어디 계시나 찾으면 어김없이 밭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들. 손힘이 없어 글씨도 삐뚤빼뚤 쓰신다는 할머니들은 호미질 할 때는 머뭇거림이 없다. 여덟 할머니의 이름은 김부임, 고순자, 국순여, 권철, 이소순, 이정수, 손옥선, 정정자. 할머니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느끼게 된다. 어느 순간은 할머니가 일곱 살 아이가 되어 화롯불에 콩을 구워먹고,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나 싶더니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사십대 여인네가 되어있다. 이야기들이 어찌나 생생한지 어제 있었던 일 같기도 하다. 할머니들 중 여든 여덟 해를 살아 온 맏언니 이정수 할머니의 집을 찾아갔다. 할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흙집을 보기 위해서다. 정갈한 마당에 들어서면 옛집과 삼십년 전에 새로 지은 집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우리 아버지가 이 집을 짓고 그해 나를 낳았디야. 그러니까 88년 된 집이지. 나는 스무 살에 화산 질마재로 시집가서 애 다섯 낳고 살다가 1970년에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왔어. 그 당시 우리 오빠가 저 흙집에서 살다가 전주로 이사 간다고 나보고 이 집에서 우선 살으래. 집값은 살면서 갚으래. 그 당시 우리 영감이 화산 삼거리로 방아를 찧으러 가면 꼭 화투를 쳐. 그 삼거리가 깡패도 있고, 노름하는 사람도 있고 주막도 있고 그러니까 환경이 안 좋았어. 고산으로 다시 오라는 소리 듣고 이사 온 거지. 흙집에서 살다가 영감님 환갑 되던 해에 이 집을 짓고 여기서 쭉 살고 있어.”

 

88년 전에 할머니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오래된 흙집.


예전의 외율마을은 녹두밭 웃머리라서 땅이 척박하고 골짜기에 들어앉은 마을이라 논밭이 적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정수 할머니는 열심히 땅을 일궜다. 농사짓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와중에 동네사람들과 쌀 계를 해서 돈을 모았다.

 

그때는 돈도 없으니까 쌀 계를 많이 했어. 내가 오십 가마니 계 왕주를 했어. 왕주하면 1번으로 타. 탄 돈으로 오빠한테 빚을 갚았지. 그 당시 한 가마니 당 십만원씩 해서 오십만원이여. 영감이랑 논일을 많이 했어. 쌀로 돈을 갚아야 하니까 농사를 쉴 새 없이 지었지. 그렇게 이 집을 샀지, 내가 번 돈으로. 이 집, 논 열두 마지기도 다 내 재산이야.”

 

이정수 할머니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부녀회장을 맡게 된 1971년부터 80년대 무렵이지 않을까 싶다. 그 당시 고산면에서 날렸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면서 이웃들과의 관계가 더 돈독해졌을 것이다.

 

양로당 처음 지었을 때 내가 부녀회장해서 살림을 도맡아 했지. 권철, 정정자, 나 셋이서 살림을 주관했지. 남자들도 많고 여자들도 많고. 큰 상을 세 개나 놓고 먹었어. 계도 많이 들고 한국 땅에서는 관광차타고 안 다닌데 없이 많이 놀러 다녔어. 관광차타고 여기서 뛰기 시작하면 그 끄터리까지 뛰고 거기서 뛰기 시작하면 여기까지 와서 뛰고 그랬어. 휴게소 가서 쉬어야만 쉴 수 있었어. 앉아있덜 못해. 통로에 꽉 들어차서 춤추느라 바쁘지 앉아있을 시간이 어딨어. 참 잘 놀았어. 그때가 좋았지. 내가 돈이 없으니까 그 대신 부녀회장하면서 동네 큰일 많이 맡아서 몸과 마음으로는 누구보다 앞장섰어. 그걸 알아줘서 동네에서 경로패도 받았지

 

할머니는 같은 마을 사는 젊은 사람들에게 늘 해주는 말이 있다. 돈 그만 벌고 영감 살아있을 때 열심히 놀러 다니라고. 몸 성할 때 벌은 돈 써가면서 세상 구경다니라고.

 

나도 이 손으로 논매고 퍽이나 고생했어. 일 퍽 했어. 농사지으니까 배는 안 굶었는데. 그때 이 동네 여자들이 여럿이 모여서 장에 나갔어. 나도 혼자 가라고 했으면 못 갔어. 허물없으니까 같이 따라서 갔지. 복숭아, 참외장사, 감도 팔고 밤도 팔고 산에서 나오는 거 죄다 주워다 팔았지. 고구마대하고 갈퀴나무도 팔았어. 갈퀴나무가 뭐냐면 소나무가 가을이 되면 단풍들어서 노랗게 떨어지는데 그걸 긁어다가 팔았어. 봉동장이랑 모래내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봉동장에 갈 때는 리어카에 담아서 싣고 가서 팔았지. 소나무 껍데기도 벗겨서 팔고. 솔방울도 주워서 팔고. 이 동네는 그런 장사꾼이 많았어. 가난하게 살았지. 그러니까 너도나도 장사하고 살아야 해.”


 


흙집과 30년 전에 할머니가 지은 새 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기역자 모양으로 여전히 사이좋게 자리 잡고 있다.


할머니가 태어나던 해, 그러니까 88년 전에 할머니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오래된 흙집과 30년 전에 할머니가 지은 새 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기역자 모양으로 여전히 사이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토방에 앉아 오래된 흙집을 가만히 바라보는 할머니의 표정은 애잔하면서도 평화로웠다. 아침에 마당으로 나와 그 흙집을 바라보며 너도 늙었고 나도 참 많이 늙었구나, 너랑 나랑 같이 늙어가는 구나그런 말들을 되뇐다고 한다.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평화로우면서도 애잔한 것이다. 마을에서 함께 아이 키우며 늙어가는 관계,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남겨진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며 또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함께 공유한 경험은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할머니 화단에는 하얀 목단이 한창이다. 젊은 시절 이웃집에서 얻어온 씨앗이 오십년 세월을 피고 지고 또 피어났다. 할머니의 마당에 앉아 지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삶 또한 풍요로워졌다. 자주 찾아뵙고 그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싶다.


호적상으로 이정수이지만 동네에서는 정순이라고 부른다. 할머니가 받은 경로패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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