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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ㅇㅇㅇ] ① 임예빈 '나의 엄마 지은솔'2019-10-14

[나의 ㅇㅇㅇ] ① 임예빈 '나의 엄마 지은솔'


 

나의

지은솔


밭을 일구는 나의 작은 거인

 

생산라인을 담당하는 회사 일을 마치면 지은솔(55)씨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치매가 온 늙은 노모를 살피고 나면 밭에 갈 채비를 한다. “엄마를 보면 생각이 참 많아져. 저게 바로 내 모습인데 마음이 아프지. 엄마 생각해도 눈물 나고 우리 자식들 생각해도 나는 눈물 나.” 그의 밭은 작물이 없을 때가 고작 겨울 한 철뿐인데, 들깨, 서리태, , 땅콩, 고구마, 고추, 옥수수, 가지, 토란, 양파, 마늘, 단삼, 감자, 아마란스, 호박, 굼벵이동부, 강낭콩, 돼지감자, 감 등이 1년 동안 은솔씨가 일구는 땅에서 나오는 작물들이다. 이제 하도 많아서 기억이 안 난다며 작게 웃어 보였다.


 

임예빈씨의 엄마 지은솔씨는 퇴근후 밭으로 나와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땅을 그냥 두는 법 없이 자투리 공간이 있다면 뭐든 심고 본다. 12마지기, 그가 혼자 일궈내는 땅이다. 혼자 일궈내려면 당연히 힘에 부칠 것이다. 그러나 못해, 안 해 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농사를 그만둘 수 없는 것은 형제자매, 그리고 자식들 조금씩 나눠주려는 마음도 있다. “도시는 이런 데 마트에서 사면 비싸게 팔아. 그러니까 조금씩 보내 주는 거지.” 은솔씨는 농사를 하면서 가장 기뻤던 적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했을 적에 처음으로 병 하나 없이 잘 되었다면서 그날을 회상했다.

 

지은솔씨는 10명의 형제들 중 6째로 태어났다. 대를 잇는 것만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자식을 낳다보니 지금의 수에 이른 것이라 말했다.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너무 좋아서 우리도 남자있다라고 외치면서 마당을 뛰어다녔다고. 그 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대문에서 남대문으로 나가는 옷을 만드는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러했고, 형편 또한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는 진짜 너무 말랐었어. 셋째언니 결혼식 때 엄마랑 언니, 동생들이 날 보고 많이 울었어. 얼마나 말랐는지 계단을 내려가다 헛것이 보여서 두 번이나 미끄러졌잖아. 그때 보니까 손목뼈가 튀어나왔더라고 바로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창피한 것만 생각나서 안 갔어. 아가씨 때라 뭘 몰랐었으니까.”

 

밤까지 일해야 되고 남대문 가려면 단추를 달아야하고 그러잖아. 그때는 내가 미싱을 안 하니까 시다(심부름꾼)해줬지. 그때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온 사람도 있었어. 졸업안하고 온 사람도 있고, 그런 애들은 너무 애기니까 심부름 시켰어. 미싱 하는 사람 있잖아 미싱사 한명 당 심부름 하는 애 1명씩 있고 그렇게 20벌 코트를 한 조가 완성을 시키는 거야. 잘 나가면 옷이 200벌 나가고 그랬지. 시다도 못하고 그러면 미싱사가 때리고 그랬어. 나는 그 언니를 잘 만나서 맞고 그러진 않았지만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근데 내가 또 그 애들 중에선 언니니까 옛날 쿠커 알지 쿠커. 거기에 부침개 같은 거 하면 같이 먹고 그랬지.”


 


많은 소녀들은 밤낮으로 옷을 만들며, 차디찬 스펀지 한 장만이 놓아진 바닥에서 쪽잠을 자야만 했다. 그곳의 어린 소녀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아마 우리는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교육을 받지 못했던 한, 배우고자 하는 갈망도 깊어져 갔을 것이다. 지은솔씨도 그러했다. 그렇게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미아리의 다른 봉제공장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 봉제공장 역시 환경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 무작정 친구와 인천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시 시작된 인생은 고달파졌다. 좋지 못한 일들이 연이어 생기자 결국 돌아갈 곳은 완주뿐이었다.

 

여기에 내려왔을 때 제일 힘들었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어. 자식 둘을 책임을 져야하니까 앞이 하나도 안보이고 몸도 아파서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 그래도 내가 낳은 자식들 책임을 져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온 거야. 그래서 마음을 닫고 살았지. 나는 작아도 짊어진 게 많아서 내가 너무 버거워. 그래서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살면서 했던 일들을 모두 말해보라고 하자 세탁소, 그릇 파는 영업사원, 안경집 만드는 일, 조화 붙이는 부업, 가지 하우스, 5개의 음식점, 지금의 회사를 다녔다고 설명했다. “나는 한평생 일만하고 사네. 앞으로는 노래로 봉사도 하고 싶고, 드럼도 배우고 싶고 많이 배우고 싶어.”

 

 

/이 글은 완두콩을 좋아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대학생 임예빈(21)씨가 자신의 엄마를 직접 취재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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