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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찬섭이 삼촌 2019-01-29

돌아온 찬섭이 삼촌


돌아온 찬섭이 삼촌

- 구이면 무지마을 구이건강원


산에서도 먹을 것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거 같다.

동네 언니 오빠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닐 때 나 좀 데려가라고 울며 따라다녔지만 그들은 홍길동처럼 산으로 사라지곤 했다. 책가방 매고 유치원생 티를 벗기 시작하니 그들의 일원으로 나를 받아주었다. 처음 떠난 모험의 장소는 동네 뒷산이었다. 손에 맞는 작대기를 하나씩 주어들고 괜히 나무들을 툭툭 치고 땅을 파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 목적 없이 돌아다닌 듯 보였겠지만 우리들에게는 늘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토끼나 꿩을 잡겠다고 나서 던 길, 밤을 한 포대 주워오겠다던 날, 다래를 찾아 떠나는 길, 그 모든 여정 속에는 꼭 산에서 먹을 것을 주워오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배를 곯던 시절은 아니었으므로 먹을 것에 대한 맹목적인 끌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다짐 속에는 동네 어른을 흉내 내는 것, 그래서 곧 어른이 될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역할놀이였던 것 같다.

누구네 아빠가 산에서 영지버섯, 싸리버섯, 능이버섯 등 구하기 어려운 것들을 따와 마을사람 모이는 곳에 내어 놓고 모험담을 늘어놓던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어른들 틈에 끼어 그 대단한 전리품을 보며 우리들은 늘 다짐을 했다. 우리도 산에 가서 대단한 먹을 것을 따오자!


유압기에서 칡즙을 짜내고 있는 찬섭씨.


박찬섭씨는 고향을 떠나 한창 때를 도시에서 보내고 사십이 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리지어 돌아다니던 그의 동네뒷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쉰 넷인 지금의 그에게는 야트막한 언덕이 된 그곳. 산과 땅에서 먹을 것을 거둬먹던 기억은 도시를 떠돌아 다녔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돌아온 고향에서 박찬섭씨는 작은 건강원을 운영하며 틈틈이 농사를 짓고 겨울철이 되면 산에서 약초와 칡을 캔다.


짜내고 남은 칡 찌거기(섬유질)는 주변 사슴농장 사료로 보내지고 농사지을 때 거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칡에 대한 첫 기억은 어릴 때 동네 형들 따라다니면서 칡 캐러 갔던 거지. 그 시절에는 나무도 없던 민둥산이었으니까 칡 같은 것도 많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 한 토막 얻어먹으려고 욕봤지. 동네 꼬마들이 다 형들 뒤꽁무니 쫄쫄 따라다니면서 칡 한 토막 얻어먹으려고. 그때는 간식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그때 기억에 칡이 지금처럼 크고 굵지 않았던 거 같아요. 워낙에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니 사람들이 산에 가서 이것저것 캐느라 뿌리가 클 세가 없었지.”



넉넉지 않은 집의 구남매 중 여섯째였던 박찬섭씨. 어린 시절 기억은 일 안하려도 도망 다닌 기억밖에 없다며 웃어넘긴다. 그는 무조건 고향을 떠나고 싶어 했다. 아버지 몰래 공업고등학교를 간 것도 그 이유이다.

 

농사짓기 싫더라고요. 아버지는 농업고등학교 가라고 했는데 나는 공고를 가버렸지. 기술 배워서 일찍 고향 떠나 살려고. 새벽 6시에 첫차를 타고 두 시간씩 걸려 학교를 악착같이 다녔네. 졸업 후에는 서울 올라가서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 취직해서 일만 했지 뭐. IMF 터지기 3년 전에 전주로 내려왔는데, 여기에서도 플라스틱 사출 일을 했지. 모나미볼펜 깍대기 만드는 거. 회사가 부도가 나고 잠시 쉬고 있다가. 공조닥트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일 맡아서 했지요. 내가 마음에 들었는가 계속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 당시 팔복동 공단 있는데서 12년은 그 일을 했는가봐. 젊은 시절을 떠돌이 생활로 보냈지. 그러다가 전세로 살고 있던 집이 소방도로난다고 나가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구이 어머니 집에 들어오게 된 거지. 고향집에 와서도 출퇴근하면서 닥트 일을 2~3년 했지. 집구해지면 다시 나가야지 했는데, 늙어가는 홀어머니 보니까 또 못나가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눌러 앉게 된 거지요.”



고향 무지마을 앞 도로변 건강원을 인수해 10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그 옆 미용실가게도 사무실로 쓸 겸 임대했는데 사무실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이 되어버렸다. 동네 형님, 어르신들이 때 되면 오토바이 타고, 전동차 타고 돌아 온 찬섭이네공간에 모이는 것이다. 점 백원 화투도 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요즘 같은 겨울철 박찬섭씨는 하루 종일 칡과 사투를 벌인다. 직접 캐온 칡, 사람들이 캐 온 칡들이 건강원 한 쪽에 잔득 쌓여 있다. 고압기로 물을 뿌려 칡 표면에 묻은 흙을 제거 한다. 그 다음 어른 다리 한 쪽 크기의 칡을 작두로 썰어낸다. 칡 토막들은 바로 믹서기로 들어가 갈아져 나온다. 갈아져 나온 것을 유압기에 넣고 짜내면 칡 원액이 나오다. 그렇게 나온 칡 원액이 향긋하고 맛은 좋지만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살균을 해야 한다. 중탕기에 넣고 열처리를 하고 식힌 후 한번 씩 먹을 양 만큼 포에 담아내고 박스에 포장을 한다. 이 모든 일을 박찬섭씨 혼자 한다.

 

노가다 할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아요. 칡은 처음 캐러 다닐 때가 힘들지 몇 번 캐 버릇 해보면 요령이 생겨서 쉽게 해요. 괭이 삽 낫 톱 맬빵. 이것이 칡 캘 때 가지고 다니는 도구에요. 약초꾼들은 보통 장화를 신어요. 뱀 때문에도 그렇고 산 다니다보면 습지 같은 곳도 있고 계곡도 훑고 다녀야 하니까 전천후 신발이지. 칡 캐는 건 일도 아니여. 매고 내려오는 게 힘들지. 맬빵으로 잘 감아서 들쳐 맸을 때 50kg정도는 거뜬히 들지. 100kg 정도는 캐야 나간 보람이 있어요. 이쪽에서는 순창 동계 쪽에서 많이 캐요. 그 쪽 칡이 맛이 좋아요. 땅이 좋아야 하거든요. 황토 마사 땅이 그쪽에 많아요. 흙이 좋으니까 잘 캐지기도 하고. 칡들이 작아 보여도 보통 5년은 된 것들이고 다리 굵기 만하게 굵고 긴 것은 보통 10년이 넘었다고 봐야지. 12월부터 4월초까지만 캐요. 겨울에만 칡을 캐는데 칡 맛 좋거든. 여름에 캐면 물이 많아서 싱겁거든요. 그래서 쓴맛이 강하게 나는데 겨울에 캔 칡은 쓴맛이 나면서 뒷맛이 달죠.”


칡캐러 갈때 들고 가는 삽과 곡괭이.


막대기 하나 들고 칡 한 토막 얻어먹으러 형님들 뒤를 따라다녔던 시절은 지났다. 박찬섭씨에게 건강원 일과 농사는 벌어먹고 사는 중요한 생업이 되었다. 그가 이 일에 재미를 붙인 것도 어떤 형님 덕분이다.

 

건강원일 처음 배울 때 8개월 정도 친구랑 같이 다른 건강원을 했었지. 그때 산에서 뭘 캐서 가져다주는 형님이 있었지. 그 형님이 네 살 위인데, 나는 사부님이라고 불러요. 그 사부 따라 한 2년 정도 진안 장수 쪽 산 따라 다녔나 봐요. 사부 따라다니면서 약초, 버섯 공부 많이 했지. 처음에는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안 보여. 이 앞에 놓고도 못 캐. 근데 5미터 뒤에 있던 사부는 그걸 보고 와서 캐. 근데 한 번 캐고 나면 그때부터 보여요. 산을 따라다니면서 요령도 있고 보는 눈도 있어야 캐져.”

 

내가 알고 하는 것과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지금껏 살아오며 여러 사부를 만났고 지금은 자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짓다보니 열 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고 배추, 옥수수, 감자, 고구마 키우는 농사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박찬섭씨는 쑥스럽게 웃어넘긴다.

 

농사가 싫어서 고향 떠났는데 지금은 내가 스스로 농사를 짓고 있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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