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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아닌 섬에 살던 시절, 길 아닌 길을 걷던 시절2018-10-01

섬 아닌 섬에 살던 시절, 길 아닌 길을 걷던 시절

섬 아닌 섬에 살던 시절, 길 아닌 길을 걷던 시절

고산 양야리 죽림마을 한보임 할머니


덕암마을 뱃사공 있던 시절
걷고 넘어 시집온 길


이제는뻥뻥 뚫려
강마다 다리도 있는데
내 다리가 성치 못하네



여행자들은 알고 있다. 느릿느릿 걸으며 본 풍경과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며 바라본 풍경이 얼마나 다른가를. 지금은 전주에서 고산까지 자동차로 삼십여 분이면 닿을 수 있지만 고산면 양야리 죽림마을에 살고 계시는 한보임(85세) 할머니가 삼례에서 이곳으로 시집올 때만 해도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6년 째 전주와 고산을 오가며 제법 많은 마을과 풍경들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본 것들은 할머니가 기억하는 것들과 사뭇 달랐다. 할머니는 걸어서 다니셨고 나는 자동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속도의 차이는 시간의 차이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차이도 만들어낸다.


“지금은 사방에 다리가 있지만 그 전에는 독다리만 있었어. 비가 조금 오면 길이 다 끊겼어. 그때 섬이 되는 거지. 큰 장마 있을 때는 나룻배도 나가질 않아. 걸어서 오일장 보러 다니던 생각하면 참 힘들었지만 자주 다녔어. 우리 애들도 고산중 다니느라 매일 그 길을 건너다녔지. 마을 뒤로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를 외얏골이라고 불렀어. 거그가 가마터였지. 거그 너머 서낭댕이가 나왔어. 거기서 내려가면 독촉골이 나오지. 물 없을 때는 그냥 고산천 독다리 건너서 가고, 물이 많으면 남봉리 쪽으로 가야 혀. 지금 남봉다리 있는데 있잖아.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어려웠어. 귀민산(구명산) 절벽이랑 강 사이로 사람하나 간신히 지나갈 길이 있었어. 그 길옆에 흐르는 물이 시커멓고 깊었어. 애들헌테 그 잔소리는 참 많이 했네. 귀민산 밑 조심히 다니거라. 귀민산 밑 끄트머리에 나루터가 있었어. 덕암마을에 뱃사공 아저씨가 있었는데 배 삯으로 보리쌀 한 바가지 주면 강 건너 고산읍내로 태워다 주고 그랬지. 배도 쬐깐해서 여러 사람이 못타니까 한두 명씩 타서 몇 번씩 왔다 갔다 했어.”


앞대산 터널을 지나는 17번 국도가 생기기 전 그리고 그 전에 있던 길마저 없던 그 시절에 삼례와 봉동, 고산과 양야리 죽림마을을 걸어서 오갔던 할머니가 기억하는 외얏골, 서낭댕이, 귀민산, 독다리, 뱃사공, 나루터 같은 것들은 지금은 없어졌거나 잊혀져가는 이름들이다. 그 시절 할머니와 어르신들이 수도 없이 오갔던 길들과 길 위의 풍경들이 이야기 내내 아련했다.


“언젠가는 삼례 친정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닷없이 비가 퍼붓는 거야. 그래서 봉동 고천리까지 가서 마그네 넘어 산 중턱으로 넘어 넘어서 집으로 오기도 했지. 어렵게 집 근처 까지 왔는데 집 앞에 흐르는 물이 불어서 또 못 건너겠는 거야. 저기 화정리까지 가서 바듯이 건너서 왔지. 아기들을 집에다 두고 급하게 삼례 갔다 오느라고 애들 밥해 먹여야 하니까 집에 반드시 왔어야지. 미친배기 마냥 아는 곳 찾아서 건너고 건너서 집으로 왔지. 이제는 길이 뻥뻥 뚫리고 강마다 다리도 있고 하는데 내 다리가 성치를 못하네.”


한보임 할머니의 20살.




고산장 나가는길 큰딸(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동네 아낙들이랑 고산천 뚝방에서



할머니는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그래도 잘 살아온 삶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스무 살에 군인이었던 할아버지 만나 임진강 근처 전방부대 마을에서 살다가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살고 있는 이곳 고향 마을에 자리를 잡고 어느덧 육십여 년이 흘러갔지만 낳은 지 삼칠일 밖에 지나지 않은 큰딸을 품에 안고 이곳에 찾아들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할아버지 환갑잔치를 치루던 집 앞마당. 가족들 뒤로 보이는 행랑채는 지금도 남아있다.


예전 모습 그대로인 행랑채. 지금은 창고로 쓰인다.



“시집와서 한동안은 시어른 집에 혼자 있다가 그래도 신랑이 나를 불러서 임진강 너머 포천군 적선면 노곡리에서 함께 살다가 결혼한 지 3년 만에 큰 딸을 낳았어. 형님 세 분이 고향에 살고 있으니까 같이 살고 싶어서 서른 살에 제대희망해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산거지. 큰 딸 낳아서 삼칠일 되는 날 안고 내려왔어. 노곡리에서 포천 나오는데도 한 나절 걸려. 포천에서 저녁내 기차타고 전주 내려서 거기서 또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에 버스를 타고 율소리에 내려서 여그까지 걸어왔지. 그때 걸어올 때 참 삭신이 쑤시던 기억이 생상하네. 길이라는 것도 있었간디. 논두덕 밭두덕 지나서 냇깔에 뛰엄다리 건너서 왔지.”


육십년 넘게 함께 살던 할아버지는 일 년 반쯤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군인출신이라 엄하긴 하셨어도 다른 이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는 퍽 재미있는 분이셨다고. 특히 전쟁 이야기를 시작하면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은 분이셔서 그 이야기를 듣느라 사위들이 꽤 고생했다고 했다.


“얼마 전에 할아버지가 꿈에 나왔어. 꿈에서도 무슨 명절이어서 집에 가족들이 다 모여 있다고 서둘러서 가고 있는데 마을회관 앞에 기다란 텐트가 있더라고. 그 안에 아 그 양반이 앉아 있는 거야. 얼굴이 말꼬롬하니 신수가 훤하더라고. 할아버지가 나보고 이 텐트 안에 들어와 같이 앉아 있자는데 내가 자식 손주들 기다리니까 가봐야 된다고 했지.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편안한 얼굴로 그래 가보라고 그러데. 꿈에서라도 그렇게 좋은 얼굴 보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



남봉 나루터 가는 귀민산 밑길. 산 밑으로 강과 접해있는 아주 좁은 길이 있었다고 한다.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경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산은 똑같이 거기 있는데 예전에 시집와서 본 산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지. 쬐깐한 소나무 하나씩 있고 뻘건 흙만 있는 산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나무가 우거졌네. 애들 여울 때가 제일 좋았어. 아들 딸 잘 커줘서 걱정이 없네. 60년을 저 양반이랑 살더랑 외로운 일없이 애들 아픈데 없이 잘 크고 살았어. 그래서 가족사진을 찍었지, 내가 여든 살 먹었을 때. 늙는 것은 뭘까. 좋은 세월도 있었을 것이고 모진 세월도 있었을 것이고 이 나이 먹을 동안. 좋기만 했겄어. 나쁜 것도 많았겠지. 내가 살아온 것들 다 생각이 나. 어떤 사람들은 문득 돌아보면 깜짝 놀라지. 하이고 언제 이렇게 나이가 먹었디야. 근데 나는 안 그래.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살았구나.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거지.”
 
완주군 지도를 한참 들여다봤다. 주지천, 화전천, 고산천, 만경강이 양야리를 싸고 흐르고 있다. 흙탕물이 흐르는 저 너머에 다섯 아이가 고물거리고 있었을 테고 마흔이 채 안된 한보임 아낙은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크고 작은 다리들이 있고 국도와 고속도로가 종횡으로 지나는 그 너머에 할머니가 넘고 넘어갔을 그 곳을 손가락으로 따라가 본다. ‘이 길이 한보임 길이지’ 라며 중얼거려본다. 완주에는 둘례길로 지나고 순례길도 지나지만 이름 모를 어르신들이 골짜기 너머 숱하게 지나다닌 길 아닌 길, 어르신들의 길을 생각해본다.



허리가 굽고 다리도 아프지만 평생하던 일을 놓을 순 없다. 집 앞에 텃밭일 조금하고 걷어들인 농작물들을 갈무리하고 계신다.




자녀분들이 좋은 것을 사다줘도 할머니는 이 낡은 유모차가 제일 편하다고 하신다. 밭일할러 갈때 주로 끌고 다니신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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