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장미경의 삶의풍경

단발머리 곱게 빗던 소녀들의 에덴2018-07-02

단발머리 곱게 빗던 소녀들의 에덴



단발머리 곱게 빗던 소녀들의 에덴

고산 에덴미용실 임순덕



 

 


바람머리로 한껏 멋을 낸 청춘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80년대 고산 읍내에는 예식장이 있었다고 한다. 삼거리와 고산초등학교 사이 길가에 자리하고 있었던 평화예식장엔 주말마다 결혼식이 열렸다고 하니 에덴미용실 임순덕 원장님이 기억하는 그 시절의 고산 풍경은 흘러간 옛 노래처럼 아련하기보다는 총천연색으로 살아 있는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 시절에는 신부화장을 독점하다시피 했어요. 고산에 평화예식장이 있었어요. 지금은 건물자체가 없어졌죠. 예식장이 참 잘됐어요. 우리 미용실에서 아침에 신부화장하고 드레스 입히고 면사포 씌워서 예식장으로 이동해서 식 진행 할 때 내가 옆에서 드레스 잡아주고 화장도 고쳐주고 그랬지요. 예식장이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81년도에 내가 미용실 시작할 때 한참 성행하고 있었고 훨씬 전부터 운영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예전엔 고산에도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죠.”

 


소 한 마리 팔아 미용실을 차리다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겁 없이 시작한 미용실을 37년이 지나도록 운영하고 있는 임순덕 원장님은 지나온 세월만큼 고산이 만들어낸 생활사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발머리와 상고머리가 주를 이뤘던 헤어스타일도 80년대에 접어들며 바람머리, 닭벼슬머리, 지라시머리, 들고양이머리 등이 그 시절 멋쟁이들의 최신 유행이었다고 하니 그 머리 모습을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임순덕 씨와 함께한 미용가위



열여덟 살 무렵에 미용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큰 딸로 태어나서 동생들이 어리고 그래서 내가 가족을 위해서 뭔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전주 고사동에 노라노 미용학원이 있었어요. 거기 기숙사가 있어서 스무 살 때 일 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죠. 그리고 스물한 살에 고산읍내에서 미용실을 개업했어요. 시집도 안 갔을 때. 처음 시작한 가게는 딱 네 평이었죠. 처음에는 장사 밑천이 없으니 친정에서 도움을 줬어요. 아버지가 소 한 마리 팔아서 개업을 시켰어요. 오백만원. 그 돈을 가지고 시작했지요. 다른 건 무서운 게 없었는데 부모님이 소 팔아 보태주신 돈으로 잘 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죠. 그래도 열심히 해서 부모님 돈 오백만원 갚았어요. 그때는 손님이 참 많았어요. 그 당시 고산읍내에 미용실이 다섯 군데 정도였는데 제가 젊어서 그랬는지 학생 손님이 많았어요.”

 

지난 세월 동안 참 많은 것들이 변해갔다. 전주를 오가는 큰 길이 뚫릴 무렵부터 활기가 넘쳤던 고산의 상권도 줄어들었고 삼사십대 팔팔하던 단골손님들도 이제는 칠순 팔순 어르신들이 되셨다. 손님들의 풍성하고 까맣던 머리는 세월 속에서 새하얀 백발이 되었고 스무 살 젊은 미용사도 그 사이 읍내 최고 베테랑 미용사로 함께 늙어갔다.

 

한참 때는 아침 730분에 문을 열었어요. 그때는 손님들이 아침 첫차로 나와서 그 시간에 문을 열어도 미용실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그때는 파마가 3,000원이고 커트는 1,500원 이었어요. 젊었을 때는 손님들도 젊었는데 저도 오십대가 되가니까 젊은 손님들이 떨어져 나가더라구요. 아무래도 농촌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으니까. 지금은 거의 어르신 손님들이 많죠. 그래도 참 분위기가 정겨워요. 내 어머니 같고. 그 당시에 오던 학생 손님들이 지금도 와요. 저는 손님이 줄었는지는 잘 못 느끼겠어요. 개업할 때 오셨던 분들이 지금까지도 오시니까요. 다만 그 당시 그분들이 참 멋쟁이고 창창하던 젊은 분들이었는데 지금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셨고 저 역시 그때는 스무 살 어린 미용사였는데 지금은 세월이 지나서 저도 육십을 바라보고 있네요.”

 


그 시절의 미용실 풍경


녹슬지 않은 메이크업 실력



촌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며 오랜 동안 단골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용기술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번 왔던 손님을 기억해내고 미용실에 머무는 적지 않은 시간동안 정성을 기울여 대화를 나누고 이웃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어야만 그들은 비로소 단골이 되는 것이다. 에덴미용실에서 미용실습생 생활을 하면 실습기간을 마치고도 보통은 삼년정도 더 머물다 가곤 했다고 한다. 그만큼 편하고 좋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키워낸 제자들이 여기저기서 미용실을 하고 있어서 원장님 머리는 제자들 몫이 된다고 한다.

 

예전에는 머리하러 오신 손님들이 국수를 삶아서 기다리는 사람들이랑 다 같이 나눠먹었어요. 나는 머리하느라 바쁘고 그때만 해도 배고픈 시절이라 먹을 게 많지 않으니까, 국수 한 솥 삶고 신 김치 얹어서 먹으면 참 배부르고 재미있었어요. 신나는 시절이었죠. 그분들이 대부분 삼십년 넘은 단골손님들이지요. 그때는 손님들이 나래비로 서있고 파마하는 손은 모자라고 하면 손님들이 옆에서 파마약도 대신 뿌려주고 그루뿌도 풀어주고 그랬어요. 할머니가 된 단골손님들이 이제는 오이며 호박씨며 모종이며 밭에서 농사지은 농산물들을 그렇게 가져다주세요.”


 

중학교때부터 단골손님 김방선 씨와 함께



37년 단골손님 김방선 씨와 막내동생 순이씨



인터뷰 내내 미용실 의자엔 단발머리 고운 오랜 단골손님이 앉아계셨다. 지금은 오십이 넘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단골이었다는 김방선씨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단발머리 스타일을 고집하고 계신다고 했다. 시골에 살면서 농사짓느라 까맣게 타고 주름살도 늘었지만 원장님은 단골 동생이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이 곱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대기 손님들이 앉아있는 소파위에는 지금은 퇴직하신 원장님의 남편께서 신문을 읽고 계셨다. 마을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농사를 짓고 있지만 가끔은 먼 곳에서 찾아오는 다섯 분의 단골 할머니들이 머리손질을 마치면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게 운전사 역할도 해주신다고 한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들이 있고 가까운 곳에서 지그시 함께 해주는 남편 덕분에 임순덕 원장님의 고산 생활사 편력은 아직 그 까마득한 여정 안에 있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고산읍내 터미널 사거리에서 고산초등학교 방향으로 이어진 거리의 풍경은 여전히 80년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아가던 그 시절의 거리풍경을 상상해 본다.


그날이 그리워 질 때면 용필이 오빠는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밉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소녀건 아줌마건 할머니건 마음은 돌고 돌아 결국 똑같아 진다. 패션 또한 돌고 도는 법. 그 시절 그립다 말고 내친 김에 에덴 미용실 문을 열고 들고양이 머리스타일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미용실 앞에서 임순덕 이창희 부부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이름없는 로드카페 주인 이경자
다음글
우정이 모락모락 모두의 목욕탕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