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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꾼 목사님의 19872018-01-08

싸움꾼 목사님의 1987

싸움꾼 목사님의 1987

비봉면 원봉산마을 여태권



70년대부터 율곡교회 목회

농민소득 향상-공동체 운동 병행

완주 친환경농업 이끈 산증인 



여태권 목사는 봉실산 아래 815농장이라는 작은 나무현판을 달고 소 스무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다.



80년 광주와 87년의 민주화운동은 어른들이 들려주는 산업화시대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와 겹쳐져서 앞선 세대가 만들어내고 들려준 일종의 역사적인 이미지들로 남아있었다.


삼십년 전 1987년 여름을 거리에서 보냈던 청춘들의 아이들이 자라서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전 영화 ‘1987’이 극장에 올랐다.


나에게 이미지들로만 남아있던 그날의 일들을 보았다. 영화의 원제는 보통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거리에서 장사하던 사람들, 노동자들, 회사원들, 학생들. 특별한 영웅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만들어 낸 역사였다. 서울에서 시작 된 시위는 부산 대전 광주 전주,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때 완주의 사람들도 초포다리를 건너 관통로, 팔달로로 향했다. 그 중심에 있던 여태권 목사는 고산 율곡교회에 막 부임한 삼십대 혈기왕성한 목사였다. 여태권 목사가 몰고 다니던 낡은 봉고차는 전쟁터를 누비는 수송차였다.

 

그 봉고차가 참 유명한 차인디.. 봉고차로 사람도 나르고 물품도 나르고 그랬지. 거기에 시위 때 쓰는 모든 물건이 다 들어 있었어. 현수막, 현수막 세우는 대나무 축대, 하여간 잡다한 것으로 그 뒤에 꽉 차있었어. 그때는 나갈 길이 용진 밖에 없으니까 초포다리 건너기 전에 검문소가 있었어. 수상한 차들은 다 못나가게 했지. 검문소에서 경찰이 멈추라고 하면 거기서 서는 척하다 팍 도망가 버리지. 서라고 뒤에서 쫓아오지만 소용없어. 서간? 내가 안 서지.”

 

촛불거리와는 다른 거리였다.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던 무서운 때였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삼십년 전의 나였다면 거리로 나갈 수 있었을까. 시골교회의 목사는 왜 거리로 나갔을까.

 

그지. 엄청난 내적인 갈등이 있었지. 거리로 나가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잖아요. 나가면 최루탄 마시고 두드려 맞기도 하고 경찰서 잡혀가기도 하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는데 그 긴장감이라는 것이 굉장히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거죠. 하기가 싫지, 하지만 그때는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 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 목사가 되어서 이걸 안하면 안 된다.. 사명감이죠.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가 아니라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거리로 나선거지. 우리는 별로 안 무서우니까. 난 목사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 전두환이 그랬데잖여. 목사들 건들면 재수 없으니까 건들지 말라고. 그러니까 시위할 때 성직자들이 맨 앞줄에서 싸우고 그랬지. 나를 전담 마크하는 형사가 있었어.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했지. 어디 가서 뭐 하나 뭘 먹나, 집 앞에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이동하면 꼭 붙어 따라다녔지. 전경들이 와서 밟으려고 전담 형사가 못 밟게 하고 그랬지.”


정미옥·여태권 부부




고산이 퍽 마음에 들어 이곳에 뿌리를 내리다

여태권 목사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마치 호랑이 같았다는 말을 종종 한다. 지금의 그의 얼굴 어디를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호랑이의 흔적. 여태권 목사님 스스로가 고백했다. 어린 시절부터 싸움꾼이었다고.

 

내가 성질이 급하고 거친 편이었어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 따라 경북 고령에서 익산으로 군산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어린 시절 기억은 싸움한 거 밖에 없어. 특히 남자아이들은 서열이 있으니까 자꾸 싸움을 시키고 어쩔 수 없이 싸움을 해야 만 했지. 20대에서 30대 까지 군산에 정착해서 나락 농사를 지었어요. 부모님이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군산에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내 삶을 엮어주는 중심지가 된 거지. 사실 내가 신학공부를 안 했을 수도 있는데 청년 시절부터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 여섯 명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하나 둘씩 다 떠나는 거야. 공무원, 은행원으로. 마지막 친구가 신학대학을 가버리고 나 혼자만 남았어. 외로워서 못 살겠는 거야. 나도 어디로 가야 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학대학 갈 기회가 생긴 거여. 80년도에 한국신학대학을 가서 공부를 했거든. 그 당시에는 모든 데모가 거기에서부터 시작됐어. 시위 주동의 본거지야, 거기가. 쉽게 말해서 데모하는 연습을 하고 나온 거지. 그렇게 율곡교회 오니까 고산이 또 유명한 곳이잖아요. 소몰이 집회부터 시작해서 여기 오니까 만날 데모하더라고, 아이고 잘 되었다, 그래서 어울려 다니면서 정이 쌓인 거지.”

 

이주하며 사는 삶에 대한 고단함을 알기에 고산에 오던 순간 이 곳이 퍽 마음에 들어 고산 땅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은퇴 후 비교적 시간이 많아진 그는 봉실산 아래 815농장이라는 작은 나무현판을 달고 소 스무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다. 자신의 가족이 먹을 만큼 농사짓고 농작물 부산물들을 알뜰히 모아 매일 쇠죽을 끓인다. 버려지는 것 없이 순환하며 소박하게 사는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혈기왕성하던 때는 이미 지나갔고 그의 얼굴은 순하다. 한들한들 힘 빼고 일해야 오래 갈수 있는 법이다.


가족이 먹을 만큼 농사짓고 농작물 부산물들을 알뜰히 모아 매일 쇠죽을 끓인다. 



지금은 내 시간과 체격에 맞게 일을 만드는 거지. 그 외의 것이 생기면 가지치기 해요. 그래서 크게 힘들진 않아요. 이제 칠십 되었는데 일도 슬슬 해야지. 젊을 때처럼 하면 쓰간.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한계 속에서 그 만큼만 하는 거 에요. 거창한 일을 한 것 같지만 주어진 그 만큼의 일만 했어요.”

 

지난 30년 동안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은 작은 지류이자 평범한 목회자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큰 강도 작은 지류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요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겪은 마을사람들과의 경험을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 당시 시집장가 안 간 처녀 총각들은 젊은 목사 여태권과 함께 거리로 나섰고 모두가 고향을 떠날 때 진득하게 남아 마을이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으로 옮겼다. 젊은이들은 중년이 되어 완주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자신의 일을 하고, 칠순이 된 여태권 목사는 소 키우는 일이 이제 자신의 일이라고 말한다. 여태권 목사는 봉실산 아래 자신의 농장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 농사에 관심 있으면 어려워 말고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뭘 해야 할지 모르고 고민만 하다가는 마음이 복잡해지기 마련. 그럴 때일수록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자연에 해를 입히지 않고 함께 사는 자연농법. 그것이 보통의 농법인데 우리는 보통을 잊고 산다. 그를 만나면 잊고 살았던 중요한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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