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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나무 아래 두 여자 이야기2017-11-06

팽나무 아래 두 여자 이야기

송옥림 할머니와 그의 친구

팽나무 아래 두 여자 이야기


 


용진면 구억리를 끼고 도는 소양천 제방도로는 아름다운 길이다. 출근길에 바라보는 용진 방향의 풍경은 왼편의 전주 시가지와 오른편의 구억리 그리고 그 뒤를 감싸고 있는 도토리나무 군락이 예쁜 야트막한 뒷산이 묘하게 대조적이다. 해질 무렵 접어드는 퇴근길의 전주방향 풍경은 좀 더 근사하다. 멀리 진안고원의 높은 산들이 아득하고 아침에 봤던 풍경들이 서로 다른 편에서 조명등을 밝히고 소양천을 사이에 둔 채로 평화롭게 전개된다. 도로와 도로 중간에 있는 사잇길이어서 이 길로 접어들면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다른 세계로 진입했다는 느낌이 드는 이 길은 되도록 나 혼자만 아는 비밀의 길이었으면 좋겠다.


 



그 길 중간쯤에 있는 아름드리 팽나무 그늘 아래 날마다 같은 시간에 앉아 있는 두 여성의 존재를 처음엔 눈치 채지 못했다. 길 가 풍경에 눈길을 빼앗겼을 수도 있고 다른 상념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팽나무 아래 정자마루에 앉아 있는 두 여성이 눈에 들어왔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는데도 그 시간이면 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송옥림 할머니(81)가 여기 팽나무 아래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삼년 전 부터다. 할머니의 집은 삼례 하리에 있는데 삼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나서 큰딸이 살고 있는 이곳 구억리 딸네 집에 살고 계신다고 한다. 답답한 마음에 산책 삼아 나선 길이 습관이 됐고 매일 오전 시간을 이곳 길가 정자에서 하늘과 강과 새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 된 것이다.

팽나무 그늘 아래 송옥림 할머니. 그의 곁에는 늘 요양보호사 김씨 아주머니가 함께 앉아 있다.



여기 팽나무 아래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삼년 전 부터야. 이 동네 구억리에서 삼년을 살고 있네. 원래 집은 삼례 하리야.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치료받고 큰 딸이 어머니 집에 혼자 두기 안 좋다고 자기 사는 이 동네로 나를 데리고 온 거지. 우리 사위가 사람 꼴을 잘 봐. 우리 큰 딸 집에 4대가 같이 살아. , , 사위, 손자, 손녀딸, 손주사위, 증손주셋, 아홉 식구에 개 두 마리 새 네 마리, 왔다 갔다 하는 고양이들. 요양보호사까지. 대식구야. 왔다 갔다 하는 요양보호사도 식구지.”

 

할머니 곁에는 늘 요양보호사 김씨 아주머니가 함께 앉아 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나 마을 어르신들은 매일 같이 다정하게 시간을 보내는 그녀들에게 혹시 모녀지간이냐고 묻곤 했다고 한다. 나도 처음엔 그녀들이 모녀간이나 고부간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나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어떤 사이죠?

 

차라리 할머니 두 세분이 앉아 있으면 그냥 동네 어르신이 나와서 놀고 계시나보다 생각하는데 딱 봐도 나는 젊잖아요. 젊은 사람이 할머니랑 같이 앉아 있으니까 다들 궁금한가봐요. 젊은 아즈매가 왜 저렇게 할 일 없이 매일 할머니랑 이 곳에 앉아 있나 하고요. 우리는 그런 생각 안 했는데. 다른 어르신들도 만나고 있지만 우리 엄마는 매일 보는 거여서 각별해요. 지금은 정 들어서 내가 안 오는 날에는 보고 싶고 걱정되고 그래요. 엄마가 모정 나오는 시간을 아니까 나 없이 혼자 나오면 걱정되기도 하고요. 나도 친정엄마가 안 계시니까 엄마라고 생각 해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짧지 않은 그녀들의 사연을 들었지만 이번에 들여다 본 삶의 풍경은 그녀들의 지나온 삶에 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보내고 한적한 길가 팽나무 그늘 아래서 지나온 삶과 다가올 시간들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녀들에게서 나는 묘한 연대감을 느꼈다. 어쩌면 여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계와 유용함의 경계를 넘어서는 그런 연대의식이 나를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십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추억을 말해 주었고 김씨 아주머니는 할머니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고 그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관계인지를 말해 주었다.

 

이 친구가 딸 같고 며느리 같아. 옛날에는 여자가 모정에 앉아있지도 못했는데 늙었는데 뭐 어쩌. 모정 한 구석에 앉아있어도 되겠지 뭐. 이제는. 내가 이 친구한테 먼저 여기 나와서 앉아있자고 했지. 여기 앉아있으면 좋아. 좋은 사람들도 많이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커피도 가져다주고 음료수도 갖다 주고 그래. 예전부터 모정은 할아버지 차지였는데. 우리가 딱 둘이 앉아 있으면 아무도 못 와.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2016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 맞잡은 두 손이 따뜻하다.



20166월부터 만나기 시작한 둘의 관계. 요양보호사 김씨는 오전 9시에 할머니 댁에 방문해서 아침연속극을 함께 보고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이곳 팽나무 모정으로 향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거의 매일 보면서도 할 이야기들은 끝이 없다. 할머니는 모정에 앉아 김씨 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꼭 소설 같다고 하신다. 이렇게 남남이 만나서 서로 마음에 두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이, 그게 소설 아니겠냐고.

 

우리 사는게 남남끼리 만나서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 와중에 좋은 사람도 만나고 안 좋은 사람도 만나고. 그런거 보면 참 재미있는거 같아요. 살만한 거 같아요.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좋은 사람이 더 많으니까. 아무리 세상이 흉흉하다고 해도 살만한 거 같아요. 만약에 우리 엄마가 옛날 사람이라고 옛날 사고방식으로 나를 대했으면 나도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근데 엄마는 세대를 앞서가는 분이어서 대화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직까지도 기억력 짱짱하시고 네비도 알고 카톡도 알고 다 알아요.”

 

어쩌다 우연히 들어선 이 길에서 나는 팽나무 아래에서 오랜 동안 우정과 연대를 나누고 있는 두 분의 삶의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길이 나에게 가져다 준 뜻밖의 선물이다. 두 분의 이야기가 서둘러 끝을 맺지 않고 좀 더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께서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다. 할머니는 여기 팽나무 아래가 너무 좋아서 매일 같이 여기를 나오고 건강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대답해 드린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다시 덕담을 건넨다.

 

그래요. 그 팽나무가 할머니 병을 낫게 해 드릴 거에요.”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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