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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행보] 이사이후 移徙以後2017-10-11

[완주행보] 이사이후 移徙以後

20. 이사이후移徙以後

혼자라면 고양이

 


이사는 정말 큰일이었다. 견적 받고 날짜 정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포장하지 않는 일반이사라 내가 짐을 다 싸야했고 그러려면 미리 이삿짐센터에서 박스를 받아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자기들이 포장이사처럼 알아서 해준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짐정리를 해야하니까 분류하고 버리고 챙기면서 사나흘은 짐을 쌌다. 뭘 잘 사지 않으니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 쓸지도 몰라서 남겨둔 잡동사니들이 잔뜩 있다. 필요하면 어떻게든 제 용도가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쓰게 되니 엄밀히 말해 쓰레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이사갈 때 빈병과 재활용을 위한 뽁뽁이 서류봉투들까지 챙겨갈 순 없으니까 한번 제대로 정리하는 셈치고 버릴 것들을 버리면서 짐싸기가 1단계. 새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정리해서 짐다운 꼴을 만드는 게 2단계. 해도해도 끝없는 노동이 열흘 정도 계속된 듯.

 

이사한 집에 마음에 드는지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느낄 새도 없이 내게 너무나 큰 변화가 생겼다. 고산의 길고양이 한 마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동물과 같이 산다는 건 자라지 않는 아기를 돌보는 끝없는 육아의 길에 들어서는 셈이다. 그 사실을 잘 아니까 평소 남의 집 고양이를 그렇게 예뻐하면서도 선뜻 같이 살 결심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일하기 싫어서 저소비생활자로 내 삶을 적응시켜가는 중이 아니었나. 집에 고양이가 있는 사람들은 운명처럼 내 고양이를 만나게 된다, 서로를 알아보고 고양이에게 간택된다고 말하지만 이 고양이가 그 고양일까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앞으로 15년 이 녀석을 보살필 각오까지는 되어있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더 조심스럽지. 녀석이 귀엽다고, 내가 외롭다고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네 애묘인들에게 자격면접시험을 보러다녔다. 나라는 사람이 고양이랑 함께 살 수 있을까요? 영숙이네 집에서는 불합격, 단풍·나무 집에서는 합격, 오이네 집에서는 조건부 합격, 미미네 집에서도 합격. 시냥·아비 집에서도 합격. 최초 구조자인 고산고 소녀들에게서도 합격. 그래, 마음을 내어보자. 실은 주공아파트로 이사가게 되면 고양이와 함께 살기라는 오래된 소원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주 진지하게 가능성에 대해 고민했다. 들이게 되면 고등어줄무늬였으면 좋겠고 뱃속 아가에게 이름을 짓듯 상상 속 내 고양이에게 주공이라는 태명도 지었더랬다. 그래. 준비된 사람만이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가족 계획이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갑자기 찾아온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고맙게 받아들이고 노력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나는 고양이와 한 집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 이름은 가지. 병원에 갔더니 못 먹어서 말랐지만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4개월 남아. 성격은 활발하고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엄청난 사실. 산책을 좋아하고 드라이브도 즐긴다. 그래, 너는 내가 여행하는 고양이로 키울 것이다. 같이 산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을 때 밥도 안 먹고 토하고 설사를 계속해 깜짝 놀라 다늦은밤 병원도 한번 다녀왔지만 지금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큰다. 아침마다 동네를 한 시간씩 산책하면서.

 

산책냥 가지는 매일 산책을 나가지. 오늘도 가지와 나는 행복하지.



/바닥(badac) 이보현(귀촌인. 자급을 지향하는 독립생활자. 무엇이든 만들고 뭐라도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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