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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빚는 에너줌마가 나가신다2017-09-05

떡 빚는 에너줌마가 나가신다

천천히 제대로 가는 떡순이

떡수니디저트 대표 김덕희

 


 

한 달에 한번 만들어지는 완두콩 신문 덕에 나의 한 달은 일주일처럼 훌쩍 지나간다. 게으름이 주특기인지라 시간 내서 게으름 좀 피울 만 하면 마감이 턱 밑까지 찾아온다. 그래도 착실하게 쓰고 있고 그 덕에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배운다. 완두콩 덕분이다. 2012년부터 시작한 연재로 쉰 두 명의 완주사람을 만났다. 주로 어르신을 만나 그들이 살아낸 인생이야기를 듣고 쓴다. 할 이야기 없다고, 별 것 없는 인생이라고 손사래 치지만 모두의 인생은 대단하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무작정 사람 찾아 헤매던 시기가 지나니 이제는 주변에 제보자도 생기고 제법 기자 흉내를 내기도 한다. 제보자라고 쓰고 보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들 또한 완주에 사는 이웃들이다. 그들이 만나고 싶은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내가 대신 만나서 이야기 하고 소개해 주는 것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오듯 그렇게 마감은 돌아오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듯 운명처럼 운주에서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떡에 미쳐 사는 재미난 친구가 있는데 한번 만나 봐 줄 텐가.”

그렇게 쉰 세 번째 완주사람 김덕희 씨를 만났다.

 

동해바다에서 완주 만경강까지 흘러온 길

김덕희(40)씨의 고향은 강원도다. 동해 어촌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답답할 때면 바라볼 수 있는 망상해변이 늘 곁에 있었다. 유치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쭉 강원도에 살았다. 남동생 소개로 경상도 남자를 만났고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남편은 완주IC 도로공사현장 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막연하게 완주에 터를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2007년에 결혼 후 아무 연고도 없는 전주에 이주해서 2012년에는 드디어 완주에 터를 잡았고 다음 해에 아기가 태어났다. 하지만 비빌 언덕이 없었다. 마음 털어 놓을 바다도 없었고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출산하고 우울증이 많이 심해졌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완주에서 아이 출산하고 집에서 오로지 아이를 돌보다 보니 산후우울증이 오더라구요.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

어요. 원래 제 성향도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는 성향이거든요. 이대로 집에 있으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아기 4개월 좀 안되었을 때부터 업고 다니면서 뭔가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죠. 남편도 집에서 우울해 하기 보다는 나가서 배우고 싶은 거 많이 배우라고 지지해줬죠. 제가 처음에 갓난아기 업고 배운다고 돌아다닐 때 사람들이 어머 쟤 미쳤나봐. 집에 있지 왜 나와서 저러고 돌아다니나.’ 대놓고 수근 대는 걸 많이 들었어요. 마음이 상했었지요. 그래도 꿋꿋하게 배운 거죠.”

 

김덕희씨가 만든 떡은 일반 떡이 아니다. 디저트 카페에서 볼법한 생김새와 맛이 있다.

 

아이업고 방문을 열고 나와 첫 발을 내딛은 곳은 완주근로자종합복지관이다. 그곳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옷 만드는 수업부터 떡 만드는 수업까지.

 

제가 말띠거든요. 여자 말띠들은 집에 가만히 못 있는 다는 말도 있잖아요. 저도 집에 있으면 골골대는데 나오면 팔팔 뛰어요.”


떡으로 소통하는 재미

남편의 당뇨와 아이의 아토피 때문에 더욱더 먹거리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설탕을 넣지 않고 자연발효시킨 식초를 만들고 밀가루로 만드는 빵보다는 쌀로 만드는 떡을 만들기 시작했다.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움을 시작했다. 떡베이킹을 배우기 위해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휩쓸고 다녔다.

떡 베이킹도 진짜 많이 세분화 되어 있거든요. 약밥부터 앙금플라워까지. 서양식 말고 우리나라 떡으로 만드는 각 종 디저트를 배웠죠. 퓨전 떡, 떡과 함께 할 수 있는 전통음료와 퓨전음료 들을 다 배웠죠. 저는 개발하는 쪽으로 소질이 있어요. 배운 만큼 제 레시피를 개발하기 시작했죠. 특허도 출현했지요. 향후 십년의 목표는 다섯 가지의 특허는 내는 거에요.”

 

올해 초 전주에서 운영하던 떡디저트카페를ㅈ ㅓㅇ리하고 봉동읍내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김덕희씨의 배움은 한 곳에 멈춰있지 않고 계속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완주농업기술센터의 청강교육생으로 참여했다가 현재는 농업대학교 발효학과 학생장이 되었다. 앙금플라워 케잌디자인협회 전북지부장, 완주군 정보화 농업인 연구회 회원, 완주청년정책네트워크단 부분분과장, 떡쑤니디저트대표, 떡과 퓨전음료 강사까지.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우울하지 않을까.

 

제가 잠을 줄여가면서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지만 생각해 둔 것이 있어서 올해까지는 바쁘게 살 작정이에요. 올해 바쁜 틈을 타서 농업대학교 발효학과 과정을 공부하고 있거든요. 배우는 것이 진짜 많아요. 완주로 오면서 천천히 제대로 하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죠.”

 

덕희씨가 만든 떡디저트들.

 

올해 초, 전주에서 운영하던 떡디저트카페를 정리하고 봉동읍내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시골에서 비싼 떡이 팔리겠냐고 주변에서 말리기도 했지만 천천히 제대로 하자는 그녀의 다짐대로 첫 발을 내딛은 거다. 덕희씨의 떡디저트가게 옆에는 떡 방앗간이 있다. 같은 듯 다른 참으로 묘한 풍경이다.

 

제가 처음에 간판 달 때, 엄청 경계하셨어요. 입장 바꿔 생각해도 저도 그럴 거 같아요. 지금은 언니네 떡 방앗간 가서 쌀 사고, 알아서 갖다 주는 사이에요. 가게 오픈하고 소통을 안 하면 제가 뭘 하는지 모르잖아요. 제가 먼저 다가간 거죠.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는 언니가 그러더라구요. 처음에는 너를 경쟁상대로 생각했다, 그런데 딱 보니까 떡 만드는 기술이 서로 다른 것을 인정했던 거죠. 우리 집에 가래떡 뽑으러 오는 사람 있으면 저는 저 집 소개해주고요. 저 집으로 떡케익 주문하러 오면 언니가 우리 집 소개해 주고요. 기름 짜러 온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방앗간 언니가 이상한 떡 좀 먹어보라고 제 떡을 내어주기도 한데요. 서로 상생이 되는 거죠.”

 

백일도 안 된 아이를 등에 업고 현관문을 나선 후 몇 년이 바쁘게 휘몰아쳤다. 그 사이 덕희씨에게는 떡쑤니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생겼고 비빌 언덕이 생겼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지금은 급할 때 아기 맡길 곳도 생겼어요. 힘들 때 도닥여 주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거죠.”

 

동네어르신들은 이 집 새댁은 퍼주는 것만 잘하니까 장사하면 안 되겠다고 하면서도 오다가다

가게를 기웃거리신다고 한다. 아마도 빵 같기도 한 이상한 떡 맛을 찾아오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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