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장미경의 삶의풍경

궁극의 한 그릇, 백여사네 국밥2017-07-03

궁극의 한 그릇, 백여사네 국밥

궁극의 한 그릇, 백여사네 국밥

백영자, 유균형 부부

 


이십여 년 전 삼백번 버스를 타고 고산으로 향하던 여인이 있었다. 서른의 끝 무렵이었다. 지금은 전주와 고산을 오가는 버스가 두 대로 늘어났고 배차시간도 15분에 한 대꼴이지만 그 당시에는 하루에 네다섯 대만 오갔을 뿐이다. 큰 길이 뚫리기 전이어서 버스로 고산 가는 길은 멀고 아득한 길이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그 여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창밖으로 바라본 낯선 풍경은 어땠을까. 아무 연고도 없는 길로 무작정 뛰어든 그때 그 당시 그의 마음에 내 마음이 포개진다.


 



낯선 땅에서 시작한 국밥집

이십여 년 전의 그 여인은 올해 환갑을 맞이했다. 낯선 고산을 떠나지 않고 살았더니 그에게는 백 여사라는 멋진 별명이 생겼다. 고산바닥에서는 국밥집 사장님으로 유명한 백 여사, 백영자씨는 이십년 째 돼지머리, 내장 삶아 국밥을 팔고 있다. 백여사 국밥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젊은 여자라고 우습게 보일까봐 일부러 사납게 보이려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눈썹도 까맣게 문신하던 시절이 지냈고 지금은 여사님에 걸 맞는 나이가 되었다. 밥은 많이 안 먹고 술만 먹는 단골들에게는 야 이놈아. 술 좀 작작 마셔라. 몸 상한다.’ 톡 소는 입담은 국밥 한 그릇에 딸려오는 맛난 반찬 같은 것이다. 국밥집 이십년 만에 땅도 생기고 집도 지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여한이 없다고 하지만 옛날이야기를 할 때는 다시 서른아홉 순한 백영자가 된다. 그때 많이 울었건만 여전히 눈물이 남아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딱 맞네. 우리 아저씨랑 나는 고향이 임실이야. 살기는 전주에서 자식들 낳고 오래 살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고산은 어찌 알게 되었냐면 친구들이랑 기름 짜러 한 3년은 왔다갔다 했었지. 오뚜기 기름집으로 들기름 짜러 1년에 두 번은 왔었어. 전주보다 좀 싸게 짜줬지. 그때도 기름 짜는 거 기다리면서 옆에 분식집에서 순대를 시켜서 먹다가 생각이 떠오르더라고. 우리 애들이 넷인데 키우고 가르치려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 당시 우리 아저씨가 버스 운전을 했었거든. 그래도 우리 아저씨 혼자 벌어서는 못 사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기름집 주인이 그러네, 언니 뭐 할라고? 내 친구가 저쪽에서 순대국밥집을 하는데 신랑이 갑자기 죽어서 가게를 내놓는다네. 그 소리를 듣고는 어느 날 하루 날을 잡고 나 혼자 버스를 타고 조용히 가봤네. 버스를 타고 먼 길을 와봤지.”


국밥을 옮기고 있는 백영자씨



남편 유균형(65)씨는 버스운전 때문에 주로 외지에 있을 때가 많았고 백영자씨는 전북대 앞에서 노점을 13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사글세방 연탄창고에 연탄은 도무지 가득 채워지질 않았다. 전주의 가겟세는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던 찰나 고산에 자리가 났다던 순대국밥집을 덜컥 계약한 것이다.

 

우리 아저씨 몰래 계약한 거야. 무서운 지도 모르고 통머리를 썼지. 그 당시는 일단 벌어서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에 어떻게는 빚을 얻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때는.”


텃세가 맵긴 맵더라

전주보다 가겟세가 싸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에는 큰돈을 빌려 가게보증금을 냈기 때문에 어깨의 짐이 만만치 않았다. 빚을 낸 부담감은 제쳐두고라도 처음 몇 년은 텃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누군가에게 고산은 따뜻한 고향이었겠지만 백영자, 유균형씨에게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객지였다.

 

누가 그러더라고 고산이 까시런 곳이어서 웬만하면 장사하기 어렵다고. 우리 아저씨가 배달 다니면서 싸움도 퍽이나 했지. 아저씨가 목수로 30년 넘게 일한 기술자고 버스운전 하면서 남 밑에서 일하던 사람은 아닌데, 넘 안방까지 뚝배기 배달을 다니니 오죽했겠어. 그때 돈도 퍽이나 많이 떼였어. 타지에서 왔다고 만만하게 보고. 3~4년간은 울고 살았어. 근데 동네 미용실 동생 한 마디에 묘하게 힘이 나더라고. 그 동생이 그랴. 언니, 울지 말고 손님 하나라도 오면 반찬 맛있게 해서 손님을 잡아. 여기서 가면 너무 억울하잖아. 한번 온 손님을 두 번 오게 만들어.”


국밥에 들어갈 고기를 썰고 있는 남편 유균형씨


딸 은숙, 성아씨와 함께 가게일을 돌보고 있다.




백영자씨는 밤인지 낮인지 모르게 고기를 삶아 국밥을 만들고 유균형씨는 오토바이 한 대로 완주 6개 면을 돌며 국밥배달을 했다. 90년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고산읍내에 사람이 넘쳐났다고 한다. 차가 많이 없던 시절이어서 화산, 경천, 비봉, 동산면 등지의 사람들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고산에서 여흥을 즐기고 가던 시절이었다. 12시는 기본이고 새벽 6시까지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갔다고 한다.

 

그때는 진짜 사람이 많았어. 사람들이 다 고산바닥에 모였지. 저녁 내 장사를 하고 밤 11~12시에 김치를 담아. 그리고 삶은 고기를 썰지. 그때는 칼자루 들고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자다가 일어나서 고기 썰고 그랬지. 그렇게 20년을 죽기 살기로 하니까 이 땅을 얻게 되더라. 집도 짓고. 넘들 쉴 때 쉬면 돈은 못 벌었지. 평균적으로 5시간을 못 잤어. 넘 잘 때 일을 해야지.”

 

집 근처 텃밭과 논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와 쌀을 식재료로 쓰고 고기도 직접 삶고 손질을 한다. 삶은 고기에서 불순물과 비계를 적당히 제거해 줘야 국물 맛이 깔끔하고 깊어진다. 정성껏 국밥을 끓여서 우리 가족들 먹는 것처럼 김치 담고 반찬 만들어서 손님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10년 전부터 일손을 거들던 큰 딸 유은숙(40)씨를 필두로 둘째 유성아(38), 막내 유무근(35)씨가 가게일은 함께 하고 있다. 식구가 함께 하는 국밥집어서 그런지, 가게에 들어서면 친척집에 놀러온 기분도 든다. 잘 자라난 자식들 덕에 유균형, 백영자씨 부부에게 주변을 돌아 볼 여유가 생겼다. 3년만 하고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하신다.

 

후회는 안 해. 옛날에는 영부인들처럼 높은 사람한테 여사님이라고 불러줬지, 나같이 못 배운 사람한테 누가 여사님이라고 불러줬겠어. 국밥집 하니까 사람들이 백여사~ 백여사 불러 주고, 그 소리 들을 때 행복하지.”

 

먹을 때는 국밥처럼 간단한 것이 없다. 밥 한 그릇 말아서 후루룩 먹으면 하루 종일 속이 든든하다. 먹는 것은 간단하지만 만드는 것은 고생스럽다. 궁극의 한 그릇. 그 속에 백 여사의 뜨끈한 인생이 담겨있다.


왼쪽부터 유균형, 백영자, 큰딸 유은숙, 둘째딸 유성아, 유성아씨의 딸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할머니의 석과불식(碩果不食)
다음글
밥집 쥔장 내외의 한결같은 20년 밥심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