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앗이 칼럼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품앗이 칼럼

> 시골매거진 > 품앗이 칼럼

[완주행보] 애정세례愛情洗禮2017-06-07

[완주행보] 애정세례愛情洗禮

애정세례 愛情洗禮

나무 밑에 앉아있기만 했는데

 


몇 달 째 세워놓기만 했던 자전거를 타고 나올 만큼의 기운이 돌아왔다. 어제는 만경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고산에 갔다. 아침에 집을 나섰는데도 바람은 덥고 무거웠다. 그래도 진한 초록 잎을 달고 그만큼 진한 풀냄새를 뿜어내는 나무 밑을 달리는 기분은 좋았다. 강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긴 무기력의 터널이 끝나가는 지도 모르겠다.

 

서쪽 숲에 네발 요정이 내린 커피라는 긴 이름을 가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우울합니다, 외롭습니다, 괴롭습니다, 돈 벌 일도 걱정입니다 하도 읊고 다녔더니 짜잔, 일자리가 생겼다. 심심합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재미도 있고 의미 있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니 오호라, 새로 생긴 고산청소년센터에서 이런저런 일을 해보자고 한다. 우울하든 말든 때 되면 배가 고파지는 나를 먹여살리기 귀찮은데 어찌 알고 동네부엌 모여라땡땡땡의 요리사 선생님들은 뭐라도 챙겨주신다.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듯 밥도 나오고, 떡도 나오고, 일도 생겼다. 쌀이 떨어져가길래 농부님께 쌀을 주문했더니 선물이라며 주고 가신다. 어느날 갑자기 달걀 한 판을 먹으라며 주시는 분도 있다. 식당에서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밥을 사주시고, 아 진짜, 다들 왜 그러세요. 원래 이렇게 사람은 다른 이를 챙기고 사는 것인가요? 기꺼이 나를 함께 길러주고 계신가요? 고마운 마음만큼 씩씩하게 잘 살면 되는 것인가요? 나는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걸까요?

 

그렇지만 삐딱한 나는 이렇듯 애정이 넘치고 주위를 돌보는 고마운 마음들에 우리동네만세를 부르지는 못하겠다. 도시에 살 때도, 여행을 다닐 때도 고마운 사람은 많았으니까, 굳이 여기라고 더 감동하지는 않을 테야, 라고 일부러 더 별일이 아닌 취급을 한다. 그렇지만 눈물이 많은 나는 달걀 후라이를 할 때마다, 밥을 지을 때마다, 얻어온 반찬을 먹을 때마다 엉엉 울고 만다. 어떻게든 이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별일이면 어떻고 별일이 아니면 어떠랴, 나는 지금 여기에 살고, 주위엔 고마운 사람이 많고, 여전히 사는 건 심심하지만, 역시나 어디서든 사는 건 심심할 테니까. 오늘의 감동을 일부러 축소시키지는 말아야겠다. 그러다보면 나도 흔쾌히 마음을 내는 고마운 어른이 되겠지.

 

마음껏 고마워하고, 맛있게 먹고, 맡은 바 성실히 일하고, 우선은 그렇게 살겠습니다.



/바닥(badac) 이보현(귀촌인. 자급을 지향하는 독립생활자. 무엇이든 만들고 뭐라도 쓰는 사람)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완주공동체이야기] 하늘소와 순환경제의 뿌리인 마을
다음글
[남현이의 청년일기-9] 너멍굴 내각 구성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