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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의 완주이야기 33] 동상면 대아리2017-03-07

[이승철의 완주이야기 33] 동상면 대아리

그 사람 동상면(東上面)은 몰라도 대아리(大雅里)는 안다.”는 속담이 고산에 있었다. 저수지가 유명해 마을 이름 대아리는 알아도 동상면인지도는 낮다는 소리이다.


 ‘대아저수지1920210일 착공, 19221225일 준공을 했는데 당시 건설비는 3112천원이었다. 겉을 돌로 쌓은(싸은) 호형(弧形:)댐으로 물이 빠지면 지금도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골짝 어귀를 막아 물이 차니 물 안은 사람의 발길이 끊겨 귀한 동식물의 보고를 이루었다. 4철 물빛이 아름답고 가을 풍광은 금강산에 못지않으며 전엔 물 가운데 섬이 있어 유람선이 돌아 나오는 수상 놀이터요, 호남평야를 적셔주는 농업용수의 수원(水源)이었다. 한 때 전북수리조합(全北水利組合) 소속이었으나 기구 개편으로 지금은 농어촌공사 소유이다.


운암산이 첫 눈에 척 들어온다. 산꼭대기 바위가 마치 서울 인왕산이나 도봉산과 같고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걸쳐 그 이름이 운암산(雲岩山)이며, 군사훈련 요건이 좋아 부사관학교 야전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새재[新峙:신치]는 저수지 공사 때 만들었고 비탈 길을 올라서면 여기부터 동상면 대아리이다. 휴게소 주인 임병용(완주문화원 이사)씨는 황소 여섯 마리를 딴 전국 씨름선수이었다. 흩어진 수몰민의 소식은 알 길이 없고 다만 아는 사람 둘이 있었으나 고인이 됐으며 고철곤(의사) 아버지가 그 중의 하나이다.


수면 위에 반도가 있고 여기에 고려 말 전주최씨 최용각 묘가 있다. 애잔한 사연이 많다. 저수지 수량을 늘리려고 지금의 둑을 쌓으니 물에 잠길 위기에 있었다. 최씨가 아닌 다른 씨족이라면 보상비 받아 이장하기 마련인데 최씨 고집답게(?) 당시 농림부를 이겨(?) 흙을 쌓아 올리고 봉분을 높여 현재 보는 바처럼 탈 없이 유지시켰다. 대아재(大雅齋)와 묘역에 들어서면 대단한 집안임에 놀란다.


3000인이 밀어다 놓았다는 삼천바위가 아직도 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완주는 이런 면에 어둔 편이다. 이 지역을 소재로 한 이홍근 지음 장편소설객토(客土)는 재미나는 졸부 이야기이다. 주인공 강석준이 고향에서 남의 여자나 건들고 과부 성폭행을 하는 등 건들건들 지내다 서울에 올라가 돈을 벌었고 고향에 땅을 사며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듯이 오만, 방자, 난체를 하다 대아저수지 뱃놀이 중 술에 취해 빠져죽은 인생무상을 그려 놓았다. 1986년 동상면을 배경으로 쓴 책이다.


옛날 운암산 서쪽에 운암사(雲岩寺)’가 있었고 구치용(15901666)은 절을 찾아 이렇게 읊었다. “손님 서봉에서 이르니/ 스님 대나무 문을 열어 맞아주네./ 술 한 동이로 달이 지는데/ 서리 맞은 국화는 황량한 뜰을 메웠구나[客自西峰至(객자서봉지) 僧開竹戶迎(승개죽호영) 一罇山下月(일준산하월) 霜菊滿荒庭(상국만황정)]. 이 좋은 저수지에 유람선이 없어 옛날 운암사처럼 황량(荒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대아저수지는 사람 빠져 죽는 물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삶의 터전으로 개발해야한다. 턱의 수염이 대접을 받지 못하듯이 완주의 물은 고여 있거나 흘러갈 뿐 아직 주인이나 영웅(英雄)을 못 만나 제구실을 못한다. 이런 걸 화이부실(華而不實)이라 한다.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뜻.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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