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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행보] 기혼행세_旣婚行世 <9>2016-10-31

[완주행보] 기혼행세_旣婚行世 &lt9>

관리실에 혼자 못 가는 여자

 

택배가 왔다. 옆동네 산내에서 여자들이 펴내는 잡지 지글스에 글을 썼는데 형편상 고료 대신 지역 농산물로 성의를 보여준다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았다. 퇴근 후 찾기만 하면 되는데 사실 나는 관리사무소에 가기가 두렵다.

 

며칠 전 시설관리 남자직원분이 집에 다녀갔다. 변기 물이 계속 새서 부품을 갈아야 했는데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봐도 인터넷에 나온 것과 구조가 달라 전문가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기 때문이다. 관리실에 문의했더니 젊은 사람들 집까지 다 손봐줄 순 없다고, 어르신이나 여자 혼자 사는 집만 도와준다고 했다. 곱씹어보면 문제적인 말이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넘어갈 수는 있는 정도의 말이다.

 

아저씨'가 외국에 있다고 얼버무렸다. 그렇지만 집에 들어와보면 눈치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분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지만 다른 어려움이 없냐고 묻는 말이 고마워서 보일러와 배수관에 대해 평소 궁금했던 몇가지를 질문했다. 본인은 친절한 마음이었을지 모르나 어깨를 손을 올리며 다른 어려움이 없냐, 고 묻는 순간 아차 싶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물은 기술적 질문에는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바로 다음날 관리사무소에 택배를 찾으러 갔는데 내가 확인서류에 서명하는 그 짧은 순간 또 어깨를 감싸며 오늘 일 잘하고 왔냐'라고, 딴에는 친근함을 표시했다. 나는 경악했다. 싫다. 두렵다. 언제고 혼자 있는 집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불과 얼마 전에 우리는 섬마을 여교사 사건, 강남역 살인 사건과 같은 뉴스를 접했다. 남의 얘기까지 갈 것도 없다. 나 역시 지하철에서, 학교에서, 여행지에서, 회사에서 최근까지도 비슷한 일을 겪었거나 겪을 뻔했다. ‘여자'인 나는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당연히 최악을 상상하고 두려워한다.

 

혼자 귀농귀촌한 여성이 동네 남성들의 원치 않은 방문을 받는다는 얘기도 숱하게 들었다. 당연히 희롱, 추행, 폭력 사건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공론화되거나 가해자가 처벌되는 경우는 적다) 그렇지만 나는 낯선 남자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그 순간에 너무 놀라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거기서 정색하며 이러지 마세요' 할 내공을 키우고 싶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본인은 친하다고 생각하고 농담을 걸지만 듣는 사람은 아니올시다. 친근함을 표시한 건데 뭐가 어떠냐고? 당하는 사람은 무섭고 소름끼친다. 아이고 어디 무서워서 농담이나 하겠냐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농담, 당신에게만 농담이다. 그 정도 공부는 이제 하셔야 한다.

 

혼자 사는 여자만 도와준다는 말이 문제적인 이유를 굳이 설명해야겠다. 시설관리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혼자 살든 둘이 살든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할 줄 모르는 남자도 있고, 할 줄 모르는 여자도 있다. 할 줄 아는 여자나 남자도 상황에 따라서는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는 게 주로 여자라는 건 왜일까. 태어날 때부터 여자들에게만 기술이 부족하도록 유전자가 구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덧붙여 나는 혼자 사는 여자만 도와준다'는 말은 세상 무섭게 들린다.

결국 나는 친구 남편에게 부탁해서 함께 갔다. 부부 연기를 할 자신은 없었지만 또 내게 농이랍시고 걸어오는 그분의 무례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봐라, 어떤 여자는 관리사무소에도 무서워서 혼자 못 간다. 혼자 사는 여자들은 집에 남자신발, 남자속옷을 걸어둔다고 한다. 나도 선의를 늘 경계하면서 사는 것이 피곤하고 안타깝다. 그러니 부탁드린다. 함부로 반말하지 마시고, 친하다고 생각해서 몸에 손대지 마시라.

 

임무를 마친 친구 남편을 관리실 앞에서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유기농 고구마와 예쁜 컵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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