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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농부 '임꺽정' 최한욱 2015-12-16

스물여덟 농부 '임꺽정' 최한욱

이효리 장필순 전도연에게 밥주던 이 남자

제주도 떠나 왜 하필 완주서 농사짓는대?

 

제주도서 유명한 식당집 아들

일에 치인 아픈 부모님께

"우리, 시골가서 농사짓고 삽시다"

 

큰 덩치덕에 별명은 '임꺽정'

좀 무서운 외모는 꽃바지-모자로

사알~짝 눌러주는 센스쟁이!

 

 

경천면 신덕마을에 살고 있는 28살 청년을 만났다. 그것도 청년 농부. 게다가 예쁘장하고 호리호리한

요즘의 젊은이가 아니라 그야말로 호랑이도 때려잡을 만한 풍채를 지닌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서론부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있다. ‘삶의 풍경2013년부터 완두콩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니

글을 쓰는 것도 이제 3년이 되어 간다. 매달 정해진 날까지 글을 써야하는 만만치 않은 압박감이 있었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들려준 굴곡 깊은 이야기들은 나의 삶 또한 풍부하게 해주었다.

 

완주 곳곳의 오래된 곳, 그 곳에서 묵묵히 일한 이들을 만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연륜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됐고 만난 분들 평균 연령이 70대였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평균연령을 확 내려준 20대 젊은이가 나타난 것

이다.

 

이 젊은이를 처음 만난 건 2014나는 난로다행사 때였다.

내 기억 속에 그는 땔감용 통나무를 곤봉 들 듯 가볍게 들고 다니며 행사장을 누볐던 것 같다. 마치 임꺽정

이 살아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보는 눈은 비슷한가 보다. 완주에 와서 형님들이 지어준

별명이 임꺽정이란다.

 

별명은 임꺽정. 이름은 최한욱(28).

길 위에서 마음껏 놀고 몸으로 일하고 경계를 넘나들던 임꺽정의 삶처럼 그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2015년 나는 난로다 행사에 스탭으로 참여한 최한욱 씨. 이때도 역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꽃바지를 입고 있다.

 

서울에서 평택을 지나 제주도. 그리고 완주에서 정착하다.

몇 년 사이 귀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 교육복지를 위해 도시로 이주

하려는 욕망들이 있을 것이다. 최한욱씨의 부모님은 조금 달랐다고 한다.

 

저희 부모님에게는 도시가 좋은 곳이 아니라 시골이 좋은 곳이었던 거죠. 제 위해 형이 있는데 저희가 때

어나기 전부터 애들은 시골에서 키워야지 마음 먹으셨데요. 시골에서 뛰어놀게 하고 싶으셨던 거죠. 그래

서 서울에서 평택 진위면 시골 마을로 이사를 했어요. 어린 시절 추억이 많은 곳이죠. 그러다가 아버지 일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 때 제주도 애월읍으로 이주하게 됐어요.”

 

제주도에서 초, , , 대학교 까지 보낸 그는 이제 성인이 되었다. 그 전에는 부모님의 의지로 이주를 했

다면 3년 전, 완주로의 이주는 전적으로 그의 의지였다고 한다. 완주로 오기위한계기를 만들어준 제주도

애월읍에선 어떤 경험들을 했을까.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꽃바지와 보라색 모자. 무섭게 생겨서 이런 귀여운 아이템으로 사람들을 웃게 하는게 기분좋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놀아볼 것 다 놀아본 남자

2003년 그의 부모님은 제주도 애월읍 해안도로가에서 식당을 시작하셨다. ‘그 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문어

두루치기와 황태구이, 황태탕, 메생이 탕 등을 주력 메뉴로 하는 밥집이었다. 9년 동안 운영을 했는데 입소

문으로 꽤 유명했다고 한다. 맛집 소개하는 TV프로그램에도 여러 번 나왔고 지금도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그 당시 사진들이 많이 남아있다.

 

저 고등하교 다닐 때 엄청 바쁠 때는 학교로 전화가 와요. 한욱이 좀 보내달라고. 장사 잘 됐지요. 그 당시

저희 식당 단골이 가수 장필순이었고 그 분이 이효리씨도 데리고 와서 먹고 가고 배우 전도연씨도 먹고 갔

지요. 재밌는 일도 많았지만 참 힘들었어요.7시부터 10시까지 쉬는 날 없이 일했죠. 장사도 참 잘 됐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사람한테 받는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너무 힘들고 짜증나서 그냥 가만히 있는데 막 눈물

이 나기도 하고 그랬죠. 별의 별 인간들이 많다는 걸 그때 알았죠

 

엄니, 아부지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삽시다

잘 되는 장사를 접고 떠나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불현 듯 완주로 온 이유를 물었다.

 

어머니가 장사하신다고 고생을 많이 하셔서 협심증이 왔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더라구요. 근데 때

마침 그때 경기가 너무 안 좋았어요. 모두가 지친 상황에서 제가 제안을 했죠. 우리 시골 가서 농사짓자고

 

최한욱씨의 뜬금없는 제안으로 가족 대이동이 일어난 거다. 장사하면서 주식공부도 하고 이런 저런 공부도

해봤는데 앞으로 농업이 희망적 일거라는 생각을 했단다.

 

농사가 망하면 그 나라가 망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좀 힘들지만 앞으로는 나아 질거에요. 이곳 저

곳 알아보다가 완주에는 로컬푸드라는 것도 있고 생산하면 직접 판매할 판로도 있고..”

 

그 사이 훌쩍 큰 최한욱씨는 2012년 부모님을 이끌고 바다 건너 완주로 오게 된다. 제주도에서 평생마실

술 원 없이 마셨고 밤새도록 놀아보기도 해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최한욱씨가 재배한 아마란스 말린 것과 찰수수 로컬푸드에 욱이네 아마란스.  욱이네 찰수수로 납품하고 있다.

 

 

젊은 몸뚱이가 있으니 못할게 어디 있겠어요.

완주 구이에서 비봉을 거쳐 현재는 경천 신덕마을,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는 집에서 부모님과 살고 있는

. 현재 아마란스 천 평, 찰수수 이천 평 농사를 짓고 있고 내년에는 오천 평으로 넓힐 계획이 있다. 최종

목표는 만 평이란다. 농사만으로 벌어먹고 살려면 크게 농사를 지어야 남는 게 있다는 걸 지난 3년 동안 깨

달은 바라고 한다. 대농으로 가려면 기계설비, 저온창고 등 투자해야 할 것도 만만치 않다.

 

처음 이주해서는 농사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어요. 그러니까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해요. 밧데리 공

, 타이어 휠 공장, 일용직 노동자, 비닐하우스 업체, 여름에는 웨이터도 했었어요. 노래주점에서. 제 생김

새 때문에 손님들이 좀 무서워하긴 했는데 사장님은 좋아 하시더라 구요. 안 해 본 일 없어요. 근데 젊잖아

. 몸뚱이 굴려서 못하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사람한테 스트레스 받는 건 가슴에 오래 남는데 몸이 힘든

건 자고 나면 다 괜찮아져요. 그래서 전 지금이 좋아요.”

 

최한욱씨의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꽃 바지. 일복으로 늘 입고 있다. 여름 겨울용으로 4벌이 있다고 한다. 너무 자주 입어서 여기저기 헤져있다

 

 어머니 이정옥씨와 함께.

 

오랜만에 젊은 청년과 대화를 나누니 나 역시 젊어진 기분이다. 어르신들을 만나면 어르신대로 참 좋다.

구절절 고생한 이야기, 모험담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최한욱 청년 농부를 보면 기대심이 생긴다. 이 청년

이 완주에서 어떤 일들과 만나게 될까. 그래서 이 청년이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동네 꼬마들에게

자신의 모험담을 얼마나 맛깔스럽게 이야기 하게 될까. 그런 모습을 자꾸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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