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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아득한 시간을 흘러온 오래된 사진관 '뽀빠이 포토' 변성수씨2015-11-05

길고 아득한 시간을 흘러온 오래된 사진관 '뽀빠이 포토' 변성수씨

길고 아득한 시간을 흘러온 오래된 사진관
뽀빠이 포토 문화사진관 변성수씨

삶도

젊음도

찰!

칵!

 

 

봉동 읍내 로타리에는 오래된 사진관이 있다.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연조 있는 사진관.

 1945년 해방되면서 故변수남님이 시작한 사진관을 그 아들 변성수씨(60세)가 이어받아 지금껏 꾸려가고 있다. 흑백사진 시절부터 컬러사진, 그리고 디지털 사진까지. 변성수씨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길고 아득한 시간을 흘러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진을 찍는다.


90년대 말 디지털 카메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 편리함에 놀랐었다. 15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동네마다 있던 사진관들은 하나 둘씩 자취를 감췄다. 집집마다 있던 필름 카메라는 서랍 깊숙한 곳에 잠들었다. 이제는 사람들 주머니 속마다 스마트폰이 있어 언제든 신속히 원하는 것을 찍을 수 있다. 편리해졌지만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고 쓸쓸하다.

 


사진관 인터뷰를 앞두고 서랍에 잠들어 있던 필름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필름카메라는 처음 만져본다는 고산고등학교 친구들과 가을날 고산읍내 풍경을 실컷 찍었다. 아이들도 필름카메라 셔터 맛을 제대로 느끼는 것 같다. 찍은 풍경들은 손 안의 필름 6통에 담겼다. 필름을 들고 뽀빠이 포토 문화사진관을 찾았다.

 

긴 역사만큼 이름도 세 개인 사진관


변성수씨의 아버지 故변수남님이 처음 사진관 문을 열었을 당시는 인물사진관이었다고 한다. 그 뒤 변성수씨가 사진관을 이어 받으면서 문화사진관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그 뒤 체인점등록으로 인해 앞에 뽀빠이포토가 붙어 현재는 뽀빠이포토 문화사진관이 정식 이름이다.
 
“70세 이상 어르신들은 문화사진관이라고 하면 못 알아들어. 인물 사진관이라고 해야 알지. 옛날에 오셨던 단골손님들은 인물사진관 어디냐고 물어물어 찾아오시곤 하죠.”

 

가게 이름이 세 번이나 바뀌어서 연령대별로 부르는 이름이 가지각색이다. 봉동의 상권변화에 따라 사진관도 여러 번 장소를 옮겼다고 한다. 변정수씨 아버지가 처음 사진관 문을 열었을 당시 이야기가 궁금하다.

 

 “아버지가 해방되기 전에 한양 가서 일본사람들한테 사진기술을 배우셨데요. 아버지 사연은 잘 몰라요. 원채 서로가 무뚝뚝했지. 살기가 복잡하니까 아기자기한 맛이 없었지. 그 당시 없이 살다보니까 무작정 나가서 우연히 배우게 된 것 같아요.”

 

故변수남님은 6.25 전쟁 통에 고향 봉동으로 내려오셨고 해방되고 나서 사진관을 개업하셨다고 한다.

 

 “처음 시작한 것은 지금의 완주중학교 앞 진성아파트 앞에서 하셨지. 그 다음 임거마을 안에서 재 오픈을 하신 거죠. 그때 인물사진관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 마을에서 내가 태어나기도 하고 오래했었지. 그 뒤 봉동초 앞 동부택배자리로 이사했지. 거기가 우리 집이기도 했고 사진관이기도 하고. 거기서 쭉 하시다가 돌아가셨지. 그 뒤에 내가 자연스럽게 이어하면서 상권 따라 지금 이곳에 자리 잡았지.”

 


어깨너머로 배운 일이 평생 일이 되다 


변수남씨에게 사진일은 집안일이었다. 농사짓는 집안의 자식은 농사를 거들 듯, 변수남씨도 아버지 일을 도와 사진일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5살 무렵이다.
 
 “옛날에는 흑백으로 수작업을 다 했지. 아버지 어깨 너머로 본거죠. 그냥 하다보니까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아버지께 배우다가 부모 밑에서 배우면 안 좋다 해서 서울로 올라가 사진을 재 복습 했지. 서울 남대문시장 퇴계로에 있었는데 몇 해 전에 올라 가봤는데 없어 졌더라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변수남씨가 사진관을 맡아서 하면서 결혼을 하게 되었고 식구가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변수남씨가 아버지 어깨 너머로 사진일을 자연스럽게 배우 듯 그의 식구들도 자연스럽게 반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형님 동생이 그랬고, 그의 아내, 아들이 모두 집안일을 돕기 위해 어깨 너머 사진 일을 배웠다.

 

 

1996년 전만 해도 사진관이 황금시절이었지


사진기가 귀하던 시절에는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사진 배달 일도 하셨다고 한다. 


 “학교 앨범을 맡으면 학교 소풍 다 따라다니지요. 운동회, 모든 행사를 기록해야 하니까. 졸업식 때가면 서로 찍어달라고 줄을 서지. 줄 서서 사진 찍고 나서 이름이랑 주소를 적지. 사진 나오면 사진관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동네 사람들 얼굴을 다 아니까 마을 별로 동네 별로 돌아다니면서 사진 배달도 했지.”

 

문화사진관 시절에는 사진관 앞에 문화예식장까지 운영하며 그야말로 황금기를 누리셨다고 한다.

 

“한창 바쁠 때는 아침 8시부터 밤12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어요. 아침에 회갑잔치 가서 비디오, 사진 찍고 점심 때 예식장 와서 예식 3건하고 나서 다시 회갑잔치 가서 마무리를 찍어야 하거든. 봉동, 비봉, 용진, 다 다녔어요. 그 전에 사진관이 꽤나 있었어요. 지금은 차차 사라졌죠. 점점 사라져가는 거야. 아날로그 때 기계를 그 당시 2억을 들여서 기계를 들여놨는데 디지털로 되면서 그 기계들이 무용지물이 된 거지.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


변수남씨의 사진관 벽면에는 아기 사진부터 가족사진, 어르신 영정사진까지 크고 작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그 중 할머니 네 분의 사진이 유난히 애착이 간다고 하신다.

 

“저 할머니들이 영정사진을 찍는다고 날을 받아서 오신 거요. 근데 마음이 그렇더라고. 사진 찍는다고 아침 일찍부터 한복 곱게 차려입고 촌에서 버스타고 읍내로 힘들게 나오신 건데. 하도 고우시길래 넷이 단체로 찍어드렸지. 저 분들이 가끔 오면 걸려 있는 저 사진보고 참 좋아하셔. 그런 걸 보면 사진이 추억이라는 것이 맞구나 싶어요.”

 

편리하고 빠르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공을 들여 찍고 그리고 며칠을 기다려 받아본 사진. 사진 한 장에 감정까지 담긴다. 그걸 보면 사진이 추억이라는 것이 맞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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