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장미경의 삶의풍경

> 이달 완두콩 > 장미경의 삶의풍경

묵은 사장에서 햇 사장에게 되물림된 오지게 꼬순 인생2015-09-01

묵은 사장에서 햇 사장에게 되물림된 오지게 꼬순 인생

왼쪽 막내아들 정신일씨, 가운데 정진섭씨와 부인 황안순씨가 46년째 고소한 기름냄새를 풍기는 기름집 앞에 나란히 서 있다.

 

기름집 인생 46년은 그래도 고소했다

고산 형제 기름집 정진섭 할아버지

무슨 일이든 몇 십 년 동안 한 곳에서 꾸준히 그 일을 해온 이들에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얼굴이 편안해 보이고 헛된 욕심도 없어 보이고 복잡한 인생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형제 기름집 정진섭(77) 할아버지도 그랬다. 머뭇거리며 형제 기름집으로 처음 들어섰을 때 할아버지는 가게 안쪽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요구르트를 주셨다. 잠시 앉아 있으니 지나던 동네 사람들이 오다가다 들르고 함께 앉아서 요구르트를 마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오다가다 들르는 곳. 꼬순내 나는 고산읍내의 형제기름집이다.

   

각시 때부터 다니던 단골집이여

형제 기름집에선 10년 단골은 명함도 못 내민다. 40년 지기 단골손님 엄분순 할머니는 가게 평상에 앉아 계신 폼이 참으로 자연스럽다. 정진섭 할아버지에게 물으려던 좋은 기름 짜는 비결, 장사 비결 같은 질문은 의미 없는 물음이 되었다. 40년 동안 찾아오는 단골 할머니의 존재 자체가 형제 기름집의 힘 아닐까.

기름 짜러 오신 엄분순(76)할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형제기름집 칭찬을 하신다.

 

내가 각시 때부터 기름 짜러 여지껏 와. 진안 주천이 고향인디 그때부터 다녔지. 지금은 전주서 사는데 13~4번은 기름 짜러 꼭 여기로 와. 기름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어. 싸고 잘 짜주고 맛이 좋고 기름이 많이 나와. 그래서 왔지.”

 

지금은 고산면에 여섯 곳의 기름집이 있다. 정진섭 할아버지가 기름집을 시작할 때만 해도 두곳 뿐이었다. 기름 짤 때가 되면 사람들이 서로 먼저 짜려고 싸움이 나곤 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가게 안이 바글바글 했지. 서로 먼저 짜갈라고 싸우니까 번호표를 나눠 줬지. 기다리는 손님들을 맞은편 다방에 모셔다 놓고 찻값 내주고 그랬어. 우리 집 덕분에 앞에 다방도 장사가 잘되었어. 다방 마담이 고맙다고 뜨개질해서 조끼 선물도 해주고 그랬어.”

   

거의 50살이 다 되어가는 깨볶는 기계.

 

바싹 말린 깨를 약한 불로 오래 볶아야 제대로 된 기름이지

형제기름집의 46년 전통은 가게 안 도처에 널려 있었다. 우선 기름 묻어 번들거리는 바닥, 기름집과 나이가 같은 나무 돈 통, 거래 장부들, 재래식 유착기와 기름 때 묻은 깨 볶는 기계들이 가게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내가 돈이 없어서 옛날 기계를 쓰는 것은 아니여. 신식기계도 써봤어. 재래식이랑 신식이랑 써보면 신식기계가 월등하게 빠르지. 신식에서는 2번 짤 것을 재래식 기계에서는 1번밖에 못 짜. 그런데 깨 볶는 것은 옛날식이 더뎌도 제 맛이 나. 약한 불로 오래 볶을수록 더 꼬순 맛이 나. 기계도 기계지만 깨는 바싹 말려서 볶아야 하는 법이여. 아무리 바싹 말려도 신식기계에 불 싸게 해서 금방 볶으면 그 맛이 안나. 우리 집 오는 손님들은 내가 40년 동안 주입식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참깨고 들깨고 다 바싹 말리고 와. 바싹 말리면 1시간 걸릴 것 40분이면 볶아져. 많이 볶으면 쓰고 덜 볶으면 덜 꼬숩고 그러지. 옛날 기계로 볶아야 제대로 된 기름 맛이 나지.”

 

유착기에서 고소한 기름이 나오고 있다.

 

기름병에 담긴 믿음의 철학

정진섭 할아버지가 처음부터 기름집을 했던 건 아니다. 잡화점을 하며 채소나 과일들을 팔았다. 하던 일을 접고 업종 변경을 한 것은 종교의 영향이 컸다.

 

우리 집이 기독교 집안이여. 조부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지. 결혼 하고 평신도에서 교회 집사가 되었는데 일요일에 이제 문을 닫아야 하잖아. 40년 전만해도 아무리 부잣집이라도 가게 하는 집들은 1년에 한 두 번 문 닫고 거의 365일을 문 열고 장사했었지. 근데 난 주일만 되면 문 닫고 교회 가서 하루를 쉬는 거지. 그리고 그때만 해도 냉장고도 없고 함석집이어서 문 닫아 놓으면 바람하나 안 통해. 내가 파는 것들이 과일, 채소인데 토요일에 문 닫고 월요일에 문 열면 다 썩어 나갔지. 상당히 외로운 일이었지.”

    

단골들에게 햇사장으로 불리는 막내아들 정신일씨가 유착기 앞에서 참기름을 내리고 있다.

 

믿음이 절실하면 길이 보인다 했던가. 야채, 과일들은 썩어나가고 고민하던 찰나에 옆 기름집이 가게를 내놓고 서울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게를 인수받았다고 한다. 46년 전의 일이다.

 

무슨 사업이 되었듯 정직하게 하면 다 성공하는 법이야. 내가 여기서 40년 넘게 장사하고 있지만 잘 되는 편이여. 왜냐.. 사람들이 믿어주니까. 잔머리 굴리기 시작하면 실패하는 법이여. 정직하게 하면 실패란 없어. 40년 넘게 단골이 드나드는 것도 서로 믿어주니까 그런 것이여. 기름 짜러 오시는 나이든 어르신들은 나보고 오래오래 살으랴. 맛난 기름 먹어야 하니께. 여기서 먹다가 다른 집 기름 먹으면 껄쩍 지근하디야.”

 

성분표와 원산지 표시 없는 빈 소주병에 담겨진 할아버지의 기름이 40년 넘게 팔리는 비결은 과학적인 근거나 세련된 마케팅 때문이 아니었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오래된 방식으로 느리게 살아온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틈틈이 저거 잘 봐라를 외친다. 2년 전부터 기름 짜는 일을 배우고 있는 막내아들에게 기계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다.

 

얼마 전까지 직장을 다니다가 지금은 어지간한 일은 아들이 다 하고 있지. 도와주다 보니까 그냥 하게 되는 거지. 나 없어도 기름도 혼자 다 짜고 그래.”

 

손님들은 아들을 햇 사장이라고 부르고 할아버지를 묵은 사장이라고 부른다.

묵은 사장의 46년 기름집도 고소했지만 햇 사장의 46년도 지금처럼 꼬순내나는 인생이 였으면 좋겠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고산시장에 피어나는 여름 꽃들
다음글
백인자 할머니의 손두부집 한백상회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