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빵은 그 자리에 있었네] "점빵이름 없어도 다 여길 알어"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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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면 수만리의 유일한 점빵 주인 김송강, 이복금 부부가 점빵 앞에 나란히 앉아 있다.
"점빵이름 없어도 다 여길 알어"
김송강(79), 이복금(74) 부부가 입석마을에서 점빵을 시작한지 올해로 51년째. 그때 김 씨가 스물 여덟, 이 씨가 스물 셋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이름 없는, 동상 수만리의 유일한 점빵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두 분 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나요?
김송강: 이 점빵 바로 앞집이 아내 집이여. 처갓집이 여 앞 인거지. 나는 김제 원평 살았는디 안사람을 전주서 만나서 같이 이리로 들어왔어.
- 점빵은 언제 열었나요?
이복금: 한 50년 넘었어. 내가 23살에 시집와서 시작했는데 내가 시방 짐 칠십넷이여. 그러니께 한 50년 넘었지?
김송강: 아, 솔찬히 오래 됐지. 여 점빵 역사도 길어. 2남2녀를 여서 다 키웠응게. 내 손주가 5살이여.
- 근처에 점빵이 이거 하나인가 봐요?
김송강: 여그 수만리에 4개 부락이 있는데(예전에는 5개 였는디 지금은 4개여) 부락 통 털어서 우리 점빵 하나 밖에 없었지. 그때는 위아래 마을서 여까지 오는데 20~30분 거리였어. 다들 뭐가 필요하면 여기로 왔지.
-그땐 장사가 잘 됐겠어요?
김송강: 아, 시방 옛날엔 토요일 일요일이 되면 거즌말(거짓말) 안 치고 하루에 돈 백만원은 벌었어. 지금은? 보면 몰러. 한 명도 없잖어. 다리(수만교)가 새로 나고 다들 밖으로 가.
점빵구석구석을 살펴보니 두터운 먼지가 내려앉은 모나미 꾀돌이 연필, 에이스 색연필, 원고지 등 각종 문구류가 유물처럼 놓여있다.
-문구류 물건이 꽤 남아있네요?
김송강: 예전엔 이 근처에 동광 국민학교라고 있었어. 학생 수가 거즌 80명 정도로 많았거든. 지금은 폐교가 됐지만. 그때 팔다 남은 것들이여. 색연필이랑 노트 같은 것들.
- 여기 점빵 이름은 뭐에요?
이복금: 이름? 없어. 입석마을이니까 입석수퍼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기냥 구멍가게라고 부르는구만. 이름 없어도 다 여길 알어. 모르면 이 마을 사람이 아니지.
-옛날에 가장 잘 팔린 물건이 뭐죠?
김송강: 그때도 술이고, 요새도 술이여. 옛날엔 노란 주전자에 막걸리 담아서 팔았거든. 그게 그땐 겁나게 팔렸어. 마당에 윷놀이 하는 사람도 겁났어. 지금은 그나마 팔리는 게 쏘주여. 실은 내가 여기 주인장이자 젤 매상을 많이 올리는 사람이여. 물건 떼면 다 내가 먹어.(웃음)
이복금: 그땐 내가 담군 묵은지도 팔았고 우리가 심은 상추도 갖다 팔았어. 안 판 것이 없지. 이 근처에 고시원이 있었거든. 새벽 나절에 고시생들이 와서 술 달라 그러면 자다가도 깨서 팔고 그랬어. 안 줄 수가 없었어.
이날 낮 2시까지의 매출은 캔맥주 3개와 생수 1개가 전부. 전주에서부터 산악자전거를 타고 오다 길을 잘못 들어온 흔치 않은 객이 팔아준 것이다.
-외지인은 오랜만이셨겠어요?
이복금: 그치. 저 양반 같은 사람은 오랜만이여. 이 점빵은 이제 뭐 단골도 없어. 다들 밖에서 사가지고 오니께. 그래도 오다가다 가끔 친구들이 오지.
-바빴던 과거가 그립지는 않은가요?
이복금: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아, 옛날이 그립지! 요새 장사도 안 되지, 나는 늙어버렸지. 지금은 재미가 하나도 없어. 옛날에는 몸이 하나라서 부족했을 정도였는디 말여. 그래도 뭐 어쩌겠어.
간판 하나 없는 조그마한 점빵 앞, 아이가 앉을법한 작은 의자에 부부가 나란히 앉았다. 3시간에 한 대가 지나간다는 버스 정류장을 응시하며 이들 부부는 오늘도 반가운 객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