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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 앞둔 광두소의 봄] 최복순-강경헌 부부2015-04-13

[수몰 앞둔 광두소의 봄] 최복순-강경헌 부부


한 하늘 아래 나고 자라 순리대로 살아온 삶

 

80평생 동고동락 최복순-강경헌 부부

 

최복순 할머니와 강경헌 할아버지는 광두소 터줏대감이다. 올해 팔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광두소 하늘 아래 나고 자라 부부 연을 맺고 평생 동안 이곳에서 논밭을 일궜다. 봄 볕 좋은 3월의 끝자락 매화가 흐드러진 매실밭 옆에서 할아버지는 두엄을 내고 할머니는 나물을 캐고 있었다. “난 여그서 나서 여그서 시집갔어. 여그는 ‘제자리 색시’가 많이 있어. 요동네서 나서 요동네로 시집간 사람이 한 여남은 명 돼여.”

 

‘제자리 색시’란 말이 정겨웠다. 대둔산 자락인 광두소는 지금도 오지인데 그 먼 옛날을 떠올리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마을 총각을 만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도 가난했던 탓에 같은 마을 강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고 했다.

 

“어디다 나 내놓을라고? 텔레비전에다 내놓으면 무섭잔여. 보기 흉하고.” 낯선 손님을 맞아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할머니도 카메라는 쑥스러우셨는지 한사코 손사래를 치셨다. 때마침 두엄 가득 실은 수레를 힘겹게 끄시는 할아버지를 거들자 할머니는 민들레를 뜯다 말고 크고 단단한 곶감 하나를 내어 주셨다. “배시나무 곶감인디 두리시(두레시)보다 크고 달아.”

 

할머니는 4남매를 뒀다. 아들 셋에 말주변 좋은 왈가닥 딸 하나. 아들들은 포항과 대구 등에서, 딸은 전주에 산다. 할머니는 “날 새면 눈 뜨고 밥 해먹고 사는 줄 알고 그렇게 살았다”며 대수롭지 않게 “그럭저럭 한 세월 살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자식들 초등학교 시절, 십 리 밖에 있는 학교를 보내기 위해 매일 자식들 손에 달걀 한 꾸러미를 쥐어 보냈다. 길을 걷다 버스가 보이면 지금으로 말해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세웠는데 그때 차비 대신 줄 달걀이었다. 하교 길엔 다시 십 리 길을 걸어 돌아와야 했지만 다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기에 서로의 처지를 보듬어가며 살던 때라고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한 때 대전으로 가서 ‘난닝구’ 공장에 다녔는데 그때도 할머니는 홀로 남은 시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이 곳 광두소에 남고 대신 시어머니가 대전으로 가 아들과 손주들을 챙겼다.

 

평생 한 곳에서만 붙박이로 살아온 세월이 야속할 법도 한 데 할머니는 타동네에서 온 사람들보다 동네 사정도 꿰뚫고 이물다(야물다)며 ‘제자리 색시’의 삶을 무던하게 반추했다.

 

“고향인디 왜 아숩지 않겠어. 그래도 나가라믄 나가야지. 인자 정부꺼라니깐. 나라 땅이 됐어.”

 

할머니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듯 몇 년 후 물에 잠기는 마을일도 담담히 받아들인 듯 했다. 그것보다는 청하지 않은 객일망정 뭐 하나 대접 못하는 실정이 더 신경 쓰이셨나 보다. “어떡한댜. 지금은 뭐 줄 것도 없고. 가을에 오믄 단감도 있고 곶감도 있는 디 꼭 와요.”

 

뭐하나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묵직하게 울렸다. 노부부 삶의 일부인 매실밭 매화는 물속에 잠길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제자리 색시를 아시나요

 

마을에서 태어나고
마을 총각 만나 결혼한
광두소 토박이들

 

광두소마을에는 유난히 ‘제자리 색시’가 많다. 제자리 색시는 그 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 총각을 만나 결혼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광두소 사람들에 의하면 광두소마을에는 팔순 동갑내기인 강경헌 할아버지를 만난 최복순 할머니를 비롯해 여남은 명의 제자리 색시가 있었다.

 

허월선(83) 할머니 역시 제자리 색시다. 스물 한 살 꽃다운 나이에 한국전쟁 통에 마을 중매쟁이를 통해 남편에게 시집왔다. 남편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친정 부모에게 잘 하는 걸 보고 정 붙이고 살았다.

 

6남매를 뒀다. 하지만 허 할머니의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아 군대에 가더니 6년만에 다쳐서 제대했다. 보리농사, 고구마 농사로 어렵게 자식을 키우며 영감님을 기다리던 바람이 무색하게 남편은 술을 좋아했다. 힘쓰는 농사일도 못해 술 좋아하는 남편에게 쌀 15가마니를 주고 산 마을 도로변에 가게를 사줬다.
“날아가는 까마귀도 불러, 술 마시고 가라고.” 할머니 속을 무던히도 태우던 영감님은 24년 술과 가게를 지키다 20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자식들이 키우라고 성화인 개 한 마리 없이 홀로 고향을 지키고 있다.

 

한복수(79) 할머니도 광두소의 제자리색시다. “우리 마을에 귀티 나고 부티 나는 미끈미끈한 총각들이 많았어. 우리 영감도 그랬지. 지금 이 집도 돌아가신 영감님이랑 같이 지었는데 당신도 여그서 돌아가셨어. 지금 보면 우습지도 않지. 어떻게 살았는가.”

 

이제는 다 자란 6남매의 자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장 난 냉장고도 못 버려 헛간 한 켠에 두 대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이 많은 할머니가 물에 잡기는 집을 두고 어찌 떠나실까.

 

“나갈랑가 여그서 그대로 살랑가는 그때 가 봐야알지.”

 

최양금(70)씨 역시 광두소에서 태어나 광두소 총각을 만났다. 최씨는 6남매를 뒀지만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을회관에서 함께 음식 만들어 먹는 걸 즐긴다. “마을에 물에 잠기면 사람들과 어디서 어우러져 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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